[독일 통일, 교회를 통하다] ‘하나된 믿음’이 ‘하나의 독일’ 이끌었다

입력 2014-03-24 03:02 수정 2014-03-24 21:12

“독일 전체 개신교 기독교인들의 특수한 공동체성이 분단된 독일인들 사이에 강력한 연결쇠 역할을 했다. 그것에는 정치적인 효과가 뒤따랐다.”

독일 통일 직전인 1990년 1월 17일 독일 로쿰에서 발표된 독일교회협의회(EKD)와 동독기독교연맹(BEK)의 공동선언이다. 동서독 교회가 분단된 상황에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추구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동질성을 강하게 유지한 것이 통일의 주춧돌이 됐다는 것이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뒤에도 서독 교회와 동독 교회는 EKD 안에서 통일성을 유지했다. 국토가 분단되고 서로 다른 체제 하에 놓였지만 ‘믿음은 하나’라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1969년 동독 정부의 압력으로 동독 교회가 EKD에서 분리됐지만 그 이후에도 양측은 교회 간, 교인 간 자매결연을 통해 교류와 협력을 지속했다. 이러한 기독교적 연대감은 목사인 아버지로부터 신앙을 계승한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통일독일을 이끄는 리더십의 정신적 기반이 됐다.

무엇보다 동서독 교회가 통일을 견인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서독 교회는 동서독 주민 간 자유 왕래를 도왔고, 핍박받던 동독 교회에 엄청난 지원을 했다. 그 결과 동독 교회는 국가로부터 직접적인 명령을 받지 않는 유일한 독립 기관으로 적대적 환경에서도 정치적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 폴러스 전 주한 독일대사는 2007년 한국 기독교평화통일추진협의회 초청 강연에서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입을 다물지 않은 동독사회의 반체제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피난처를 구했다”며 “동독의 개신교는 통일에 큰 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동서독 교회는 잘 훈련된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치적 완충지대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정치범 석방 거래(프라이카우프)가 대표적이다. 서독 정부가 대규모 정치범 석방에 대한 대가를 비밀리에 조성해 동독 정부에 전달하기 어렵게 되자 양측은 대안으로 서독 교회의 동독 교회에 대한 원조 통로를 이용하기로 합의했다.

동서독 교회가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동시 가입해 활동한 것도 독일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이러한 동서독 교회의 역할은 한국 교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치적 이념을 넘어 남북한 교회가 한 울타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할 때 통일은 앞당겨지고 탄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동교회 박종화 담임목사는 “통일선교를 지향하는 남북한 교회가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 교회의 역할을 중요한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중 기자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