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정권과 교회 관계] 동독 주민들은 교회 신뢰…‘유화정책’ 이끌어내
입력 2014-03-24 03:01
동독은 집요하게 교회를 탄압했다. 종교는 마르크스주의에 동화해 소멸되어야 한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무신론적 사회주의 혁명에 ‘평화와 화해’라는 기독교적 가치는 걸림돌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 동독 집권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SED)은 1983년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와 맞지 않는 유일한 기구”라고 지적을 하기도 했다.
동독 정권의 교회 탄압은 크게 세 기간으로 나뉜다. 정권 수립 후부터 1968년 헌법 개정까지가 1차 기간이다. 2차 기간은 그 이후부터 1975년 헬싱키 협정까지, 3차 기간은 1975년부터 통일 직전까지다.
먼저 동독 정권은 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 제정된 헌법을 통해 주민들에게 바이마르 시대와 똑같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했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했다. 실제 1950년대 당시 동독 인구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지만 동독 정권은 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금지시켰다. 특히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에는 교회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다. 동독 정권은 이후 모든 공무원, 경찰, 군인들에게 교회 탈퇴와 SED 가입을 강요했다. 또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견신례를 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사회주의 헌신식을 선택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것도 금지했고, 교회 십자가 탑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동독 정권은 1968년 헌법까지 개정하며 더욱 집요하게 교회를 탄압했다. 당시 동독 정권은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39조 2항을 개정해 “교회의 활동은 동독의 헌법과 법률적 규정에 일치하는 한 행해진다”고 적시했다. 정권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교회의 활동과 집회를 제한한다는 의미였다. 또 새 헌법에 따라 교회의 유일한 재정 수단인 교회세(Kirchensteuer) 제도를 폐지했고, 신자들에게 보험 및 연금제도 혜택을 주지 않았다. 일부 신앙 활동도 범죄행위로 규정해 기독교인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철저한 종교탄압을 감행했다. 결국 동독 정권은 1969년 동독 교회를 동독기독교연맹(BEK)이라는 이름으로 독일교회협의회(EKD)와 분리시켰다. 국가는 동·서독으로 분단됐지만 교회는 나눠지지 않았던 독일에서 동독 정권이 기독교마저 분리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인 분위기는 비폭력을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교회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동독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신뢰를 동독 정권이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동독 정권은 1975년 헬싱키 협정에서 평화·협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1978년 당시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알브레히트 쇤헤르 BEK 의장 회담 이후 동독은 형식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교회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가 사회·정치 문제들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그 대표적인 곳이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이 교회다. 성니콜라이 교회는 매주 월요일 평화의 기도회를 열며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안식처이자 해방구 역할을 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