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우리 가족은 나훗카 유일한 한국인, 더불어 사는 축복…

입력 2014-03-24 02:18


하나님의 은혜

만일을 대비해 고려인인 양 선생 주소를 준 김영국 장로의 배려가 하나님의 은혜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감사로 느껴졌다. 마중 나오기로 한 친구가 공항에 못 온 것부터 종이에 적힌 주소까지 정확히 데려다 준 택시기사를 만난 것, 러시아말이 서툰 날 위해 서투르게나마 한국어를 하는 양 선생 가족을 만난 것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러시아 도시 외관은 초라한 회색빛을 띤다. 하지만 실내는 유럽풍이 나는 고급 아파트들이 많다. 고려인 양 선생 집도 그랬다. 집안의 장식을 보니 러시아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발음으로 가족들이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풍경도 새로웠다. 양 선생 집에 있으니 공항에서 느꼈던 불안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몇 시간 뒤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 남일우 선교사가 양 선생 집으로 찾아왔다. 이웃 도시에 전도하러 갔다 시간이 지체됐다는 것이다. 전도하러 갔다는데 선교사인 내가 어찌 원망할 수 있으랴. 남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의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후에도 그는 하바롭스크 공항으로 마중을 자주 나갔다. 그의 연락처 하나 들고 온 생면부지의 선교사 후보생들을 위해서다. 선교사 후보생 교단이 달라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들을 사택으로 데려와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통역을 구해 선교지로 보내주는 일을 수년 동안 감당했다. 요즘은 인천과 블라디보스토크 간 직항이 있어 수고를 덜게 됐지만 당시 초임선교사에게 남 선교사는 큰 도움을 줬다. 남 선교사와 아내 장경순 선교사의 수고는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리라.

선교는 배우는 일이다

일주일 뒤, 나는 양 선생과 사역지인 나홋카로 가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하바롭스크에서 나홋카는 기차로 17시간 거리다. 저녁에 타면 밤새 달려 낮에 도착할 수 있다. 처음 타보는 러시아 기차는 침대기차로 생각 외로 고급스러웠다. 내가 탄 기차 칸에는 양 선생과 나 외에도 러시아인 두 명이 더 있었다. 이들은 양 선생에게 열심히 질문했다. 이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러시아로 왜 선교하러 왔느냐? 러시아에는 정교회도 있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왜 선교사가 돼 이렇게 젊음을 허비하느냐?”

새로운 환경에 취해 있는 내게 러시아인들이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숨을 고르고 차분히 대답했다.

“나는 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진 러시아에 배우러 왔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섰는지 러시아인의 자세가 반듯해졌다. 어찌 보면 굴욕적인 대답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누군가 이 같은 질문을 한다면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선교는 오직 현지의 다양함을 배우며 섬기는 사역일 따름이다.

선교에 대해 이 같은 생각을 정리하게 된 건 1990년 중국에서의 일 때문이다. 중국과 국교가 없을 당시라 홍콩을 경유해 비자를 해결하고 동북3성으로 사역을 갔다.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을 하루에 한 지역씩 돌았다. 밤 10시에 시작한 집회는 다음날 새벽 3시에 끝났다. 그리고 공안이 출근 전인 이른 아침에 다른 도시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전했다. 맨 앞에 잇몸만 있는 할머니가 연신 ‘아멘’을 외쳤다. 나는 설교 도중 그분을 가리키며 “진심으로 저보다 이 할머니가 더 훌륭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할머니는 나를 만나기 위해 집회가 끝날 때까지 뒤에서 기다렸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내 생애 다시는 목사님을 뵙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날도 오는군요. 난 문화대혁명 때 성경을 비닐에 두세 겹 싸서 땅속 구덩이에 숨겼다오. 그리곤 새벽에 구덩이에 들어가 촛불을 켜 성경을 보고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지요. 그런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살아있는 목사님을 보다니요….”

할머니 말을 듣는 순간 난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움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후 선교지에서는 끝까지 배우는 마음을 갖기로 마음을 정했다.

밤새 달린 기차는 다음날 낮 11시가 돼 나홋카에 도착했다. 내려보니 기차역 하나만 보이고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어촌이다. 산 너머 또 하나의 동네가 보일 정도로 한적한 모습이었다. 인구 20만이 사는 항구도시로 알았는데 도시 분위기는 썰렁했다. 양 선생은 사할린 출신의 지인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오지 선교

선교지에 도착한 첫 날, 마음은 한없이 우울하고 쓸쓸했다. 러시아에 도착해 하바롭스크 같은 큰 도시를 봐서일까. 작은 어촌 도시를 보니 유배된 지역으로 온 죄인마냥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하며 왜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냈는지 질문했다. 여행가방은 열지도 않았다. 러시아 지도를 펴놓고 홀로 큰 도시로 갈 궁리를 했다. ‘모스크바로 갈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갈까? 아니, 키예프나 노보시비르스크는 어떨까?’

기도할수록 하나님은 머릿속에 성경의 한 사건을 떠오르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롯의 사건이다. 삼촌과 조카 롯의 종이 다투자 이들은 서로 헤어지기로 합의한다. 젊은 롯은 대형도시인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다. 롯에게 결정권을 먼저 준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남는다. 이들의 인생 마지막은 어떠했는지는 다 아는 내용이다. 난 큰 도시를 선택해 패망의 길을 걸은 롯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하나님, 잔머리 굴리다 불행한 삶으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사역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게도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시작한 사역이 올해로 23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허락하셨을까. 어마어마한 영적 축복을 주셨다. 나 혼자에게만 받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큰 축복이다.

이곳 나홋카는 우리가 유일한 한국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엔 연해주 주청사가 있다. 그래서 유학생이나 주재원, 사업가들은 연해주 제1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인다. 하나님은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에서도 오지 같은 곳에 우리를 보내 현지인과 살게 하셨다. 언어를 배우게 하셨고 문화를 배워 현지화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

2000년 우리 가족은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선진국 국적은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당시 경제가 추락하던 러시아 국적을 원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나는 하늘나라 국적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선교는 이 땅의 것을 포기해야 가능한 것 아니던가.

지금도 예전의 나처럼 오지에서 사역하는 동료를 보면 가슴이 찡하다. 오가는 길이 멀어 공항 가까이에서 사역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오지에서 사역하면 큰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들이 있다. 사역 본질에서 멀어지지 않고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깊은 오지에서 일하면 모든 사람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 지역주민의 수로 교제의 폭이 정해지는 게 아니다. 오지 선교사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오지에서 사역한 덕분에 누구를 만나도 속내 깊은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받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축복을 받았다. 이것이 내가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다. 이 영적인 축복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보라.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박광배 선교사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