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기쁜 포기

입력 2014-03-24 02:24


훈훈한 낮 기온이 저녁에는 거짓 같아진다. 부드러운 바람이건만 목덜미를 파고드는 기세가 사뭇 휘몰아치는 듯하며 시리다. 그래도 봄은 봄. 지하철 계단 밖 옆쪽에 쟁반만한 비닐보자기를 깔고 봄나물 요만큼씩 파는 노점상이 많아졌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 세차지면 몇 무더기 산나물 들나물이 시들시들 볼품없게 돼 버린다. 노인은 거칠고 곱은 손으로 틈틈이 나물을 다듬어 가지런히 놓고 덧얹기도 한다.

해가 길어졌다고 하지만 겨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다. 퇴근시간대가 되면 스산한 땅 그림자가 귀가하는 이들을 종종걸음 치게 한다. 노인의 나물이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행인들 눈길이 낮은 길바닥까지 미처 닿지 못했을 수 있고 혹은 나물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팔십은 좋이 되었을 노인의 거북처럼 굽은 등허리와 쇠잔한 몸피가 위태위태하며 안쓰럽다. 기온마저 이렇게 뚝 떨어지다니. 바닥이 얼마나 찰까. 한 줄기 시래기 같은 노인은 당신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발길들에 대고 연신 “내가 직접 뜯어온 거요, 향이나 좀 맡아보오” 한다. 지나는 이들 귀에 들리려나싶게 힘이 없다. “내가 여태 다듬어놔서 다듬을 것도 없구먼. 물에 한 번 설렁설렁 흔들기만 하면 되는데.”

한 발 늦었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 모두 얼마치냐고 하려는 참에, 앞서 지나쳐간 칠십대 아주머니가 급히 되돌아와 먼저 묻는다. “할머니, 냉이는 얼마고 쑥은 얼마예요?” 쑥은 애쑥이라서 냉이보다 가격이 높다. 저 아주머니 사고 남는 나머지를 사는 수밖에, 생각을 바꾸는데 아주머니가 이어 말한다. “그냥 다 주세요. 제값 다 받으시고요. 우리 어머니 같은 분이 애써 하신 나물인데 다 받으셔야죠. 날도 이렇게 차고….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노인네 병 나시겠습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다 말고 도로 왔네요.”

어느 재벌 자제가 보여줬다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며칠 화제다.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돕는다는 옛말이 거저 생긴 말은 아니렷다. 연로한 어느 사고 운전기사에게 보여준 재벌 자제의 따뜻한 처사가 그래서 더 회자되며 빛나나 보다. 하지만 그에게만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가 주어지진 않았을 게다. 양손에 검정 비닐봉투를 들고 앞서가는 아주머니 뒤를 따르며 ‘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도 떠올려본다. 나물을 못 팔아드리고 만 저녁의 이 기꺼운 포기와 함께.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