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통일의 길 찾다] “애국은 말로만 안돼… 국가 재건 피눈물 나는 노력 필요”

입력 2014-03-22 02:45

50년 전 독일 방문한 박정희 前 대통령의 당시 회고

“국토분절과 민족분단이란 공통의 비극을 지닌 두 나라가 서로 흉금을 터놓고 이해했다. 가장 큰 소득이라면 앞으로 공통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최대의 협조를 다짐했다는 사실이다.”

50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을 찾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직접 자필로 작성한 ‘방독 소감’에 이렇게 적었다. 보릿고개로 국민이 굶주림에 쓰러져 가던 가난한 나라의 정상이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독일 땅에서 느낀 감정을 박 전 대통령은 조목조목 소감기에 담았다.

그는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국가부흥을 가져온 독일인들을 우리는 직접 목격했다. 한 가정을 재건하는 데도 전 가족이 나서야 하듯이, 하물며 민족국가의 재건을 이룩하자면 전 국민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누가 없겠는가.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위하는가 하는 것이다. 애국이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과 조국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독일인들의 근면함을 본 소감을 전했다. ‘치마 한 치를 줄여 입고 성냥 한 개비를 절약하는’ 독일인에게 깊은 감명을 느꼈다고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방독소감은 독일의 현실과 한국에 대한 관심, 독일의 경제력과 국민성, 베를린을 둘러본 감정 등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베를린에서 박 전 대통령은 “분단장벽과 철조망 건너 멀리 바라다보이는 동독 사람들의 모습에서 북한동포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행 모두가 참담한 표정들이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밝고 어두운 두 개의 세계가 경계 짓고 있었다”고 썼다.

또 “서베를린의 화려한 고층건물들이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버린 낮은 층의 동베를린 건물들을 위압하듯 내려보고 있었다”고도 했다. “모든 독일인, 모든 한국민족이 마음대로 다니고 이야기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그날,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니고 실현되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고 희망했다.

당시 자신과 한·독 정상회담을 가졌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총리에 대해서는 “과거의 감정에 사로잡힌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 될 수 없다고 한결같이 말해주더라”면서 “과거의 감정을 잊을 수 있는 용기와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로 전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회상했다.

박 전 대통령은 독일의 국민성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자세하게 기술했다. 뮌헨을 방문했을 때 19세기 이 도시를 강점했던 프랑스가 건립한 나폴레옹 전승기념비를 봤다면서 “독일을 침략한 적장의 기념비는 왜 남겼느냐고 물었더니, 독일인 관리가 ‘후손들이 저 비를 볼 때마다 정신 차려서 다시는 외적에게 침략 당해선 안 되겠다고 느끼는 산 교훈이 아니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는 노동자들이 저녁에 가서 술 마시며 하루의 피곤을 푸는 우리나라 목로집(주점)이나 대포집 같은 술집이 많다. 근면하고 일밖에 모르는 그들도 저녁에는 이곳에 모여 술 한 잔씩 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적기도 했다. 이어 “그렇지만 그곳에서 독일인들이 싸우거나 서로 소리를 지르는 일은 없다고 한다. 맘껏 떠들고 밤늦도록 놀아도 서로 예의를 지키고 질서가 유지된다”고 부러워했다.

위대한 독일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고향이자 서독의 수도 본을 방문했을 때 전해들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본에는 베토벤 생가가 있는데 2차 세계대전 중 파괴가 됐다. 베토벤이 직접 치던 피아노도 다 파괴됐을 것이라고 독일 국민이 모두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 생가를 관청에서 재건하고 났더니, 근처 시민들이 하나둘씩 베토벤이 쓰던 물건들을 지니고 있다가 가져왔다. 피아노도 있었다고 하더라”고 썼다. 박 전 대통령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이며 조국의 문화를 아끼는 국민들인가”라고 감탄했다.

박 전 대통령이 길게 쓴 이 방독 소감은 이후 추진한 여러 정책들을 예고하는 듯했다. ‘잘 살아보세’를 외쳤던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7·4 남북공동성명 같은 통일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서독에서 귀국한 뒤 직접 자필로 ‘방독 소감’을 작성했으며, 이듬해 한 출판사를 통해 책자로 발간됐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