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성별인증서를 폐기하라
입력 2014-03-22 02:16
요즘 TV 드라마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평일에는 언감생심이지만 주말 오전에는 늦잠 자고 일어나 ‘아점’을 먹고 난 뒤 TV 앞에 붙어 앉아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한 편의 드라마. 처음에는 ‘뭐야’ 싶었다. 제목 때문이었다. ‘잘 키운 딸 하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가족계획 운동은 다양한 표어들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면하지 못한다’고 많이 낳지 말자고 설득했다. 70년대에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다. 80년대에는 ‘둘도 많다’며 하나 낳기 운동을 펼쳤다. 아들선호 사상이 뚜렷한 때였으니 딸 하나에 만족할 이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온 표어들이 ‘훌륭하게 키운 딸들 새 시대의 주역들’ ‘잘 키운 딸 열 아들 안 부럽다’ 등이었다.
지난해 12월 2일 시작한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이렇다. 400년 역사를 지닌 ‘황소간장’은 남자만 가업을 잇도록 돼 있다(에효효). 그런데 이 회사 장판로 회장의 외아들은 딸만 셋 두고 있다. 어느 날 외아들의 하룻밤 외도로 태어난 손자 라공이 나타나고, 외아들은 교통사고로 죽는다. 장 회장은 가업을 잇기 위해 손자와 손자의 생모를 받아들인다. 손녀딸들과 며느리는 내쫓고. 내쳐진 며느리는 유복자로 딸을 낳는다. 생활이 곤궁해 딸들에게 교육을 시키기 어렵게 되자 막내딸 하나를 남장을 시켜 장 회장에게 보낸다. 이름도 은성으로 고쳐.
장 회장은 라공과 은성, 두 손자를 경쟁시킨다. 남장 여자인 은성은 진짜 남자 라공과 정정당당하게 겨뤄 이기고, 14대 대령숙수가 된다.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라공은 은성의 뒤를 캔다. 장 회장은 은성이 여자임을 알게 되자 크게 노하며 가문에서 쫓아낸다. 장 회장에게 손자 은성은 “자랑이었고 희망”이었지만, 손녀 하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것.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똑똑한 은성이가 아니, 하나가 가문에서 파문 당한다. “역시 드라마지, 21세기에 있을 법한 일이냐”면서 코웃음 쳤으면 좋겠지만 한숨만 나왔다. 실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은수미 의원(민주당)이 2012년 고용보험 자료를 바탕으로 30대 기업 신규 채용자 중 여성 비율을 살펴본 결과 31.8%에 그쳤다. 취업준비를 하는 여성들이 최대의 스펙으로 ‘남성’을 꼽는 것이 엄살이 아님을 보여주는 통계다.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1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중국인들이 ‘천송이(TV 드라마 주인공) 코트’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게 만드는 공인인증서를 규제의 예로 들었다. 여성들의 합격과 승진을 막는 남성 임원들의 ‘성별인증서’는 알고 계신지? 박 대통령은 한국경제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라고 지적한 맥킨지의 비유도 인용했는데 물을 뜨겁게 하는 것이 규제뿐일까.
지난해 4월 발표한 ‘제2차 한국 보고서, 신성장 공식’에서 맥킨지는 한국경제 문제점의 하나로 낮은 비율의 맞벌이 가구와 출산율에 기인한 노동시장 문제를 꼽았다. 이어 한국경제 문제점 해결책으로 여성 노동참여 확대 및 출산율 하락 저지를 들었다.
능력보다는 성별로 판단하고 중용하는 장판로 회장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한국경제’라는 개구리를 가마솥에 넣은 채 장작불을 때는 이들이다. 남성 임원들이여! 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경제를 위해서 성별인증서를 폐기하라.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