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관료 수난시대

입력 2014-03-21 02:36


“탁상행정 펴는 공무원도 문제지만 선거 의식한 청와대·정치권 입김도 없어야”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샤워실의 바보(a fool in the shower room)’란 말을 했다. 샤워실에 들어간 성질 급한 사람이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이 나오자 진득하니 기다리지 못하고 뜨거운 물과 찬물을 번갈아 틀어 샤워를 망치는 것을 말한다. 관료들의 일관성 없는 갈팡질팡 정책 때문에 사회적 낭비가 크게 발생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요즘 박근혜정부를 보고 있노라면 이 말이 딱 들어맞는다. 현 정부는 장기간 침체돼 있던 부동산시장을 살리기 위해 노무현정부가 박아놓은 ‘대못’들을 하나둘 뽑아냈다. 지난해 취득세 영구 인하와 수직증축 리모델링 허용 법안에 이어 올해 초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폐지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모처럼 부동산시장에 온기가 돌고 거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월세 세입자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사각지대였던 주택 임대소득에 제대로 과세하겠다며 찬물을 뿌렸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것은 과세의 대원칙이다. 문제는 하필 부동산시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시점에 세금을 걷겠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부동산시장 불씨를 살려가도 부족할 판에 임대소득에 과세하겠다고 하니 누가 집을 사려 하겠는가. 부동산시장이 요동치고 주택 임대인들이 반발하자 정부는 1주일 만에 임대소득 연 2000만원 이하 영세 집주인에 대해선 과세를 2년 미루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13월의 월급’이라 불리던 연말정산 환급분 해프닝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2012년 9월 경제 활성화 대책의 일환으로 원천징수 세액을 많이 떼고, 많이 돌려주는 방식에서 적게 걷고 적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조삼모사식 변경이었지만 매달 손에 쥐는 월급을 많게 해 소비를 늘리자는 취지였다. 대선을 앞두고 나온 정책이다. 하지만 지난달 말 연말정산 환급액을 받기는커녕 수십만∼수백만원을 토해낸 월급쟁이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정부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을 고민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올해부터 근로소득세제가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 방식으로 바뀜에 따라 연말정산 환급분이 더 줄어드니 내년 초에는 월급쟁이들의 원성이 더 커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원숭이에게 아침에는 도토리를 3개 주고, 저녁에 4개 주던 것을 바꿔서 할 일은 아니다. 세제 개편을 하면서 세부담 증가 중산층을 넓혀잡았다가 대통령 말 한 마디에 뒤집은 것도 몇 달 전이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은 성과를 내기 위해 관료들을 닦달하고 있다. 20일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도 “공무원들의 자세와 의지, 신념에 따라 규제개혁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며 “보신주의에 빠져 국민을 힘들게 하는 부처와 공무원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공직사회의 변화를 주문했다. 규제개혁장관회의를 준비한 한 고위 관료는 “전체 규제의 32%는 법과 제도가 아니라 공무원들 때문에 풀리지 않고 있다”며 “공무원들이 (밖에서 운동은 안 하고) 트레드밀에서 뛰면서 열심히 하는 줄 알고 있다”고 한탄했다.

맞는 말이다. 공무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권한만 행사하려다 보니 설익은 정책이나 엇박자 정책들이 나오고 있다. 대통령의 다그침에도 관료들에게선 비장함이 안 느껴진다. 그런데 과연 관료들만 문제일까. 누가 ‘남행열차’(남은 기간 행동 조심, 열심히 눈치 보다 차기 정권까지 살아남자) 건배사나 읊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을 만들었을까. 행정고시에 합격한 최고 엘리트들이자 수십년씩 전문 분야를 다룬 관료들이 며칠 만에 냉·온탕 정책을 내놓는 것은 선거와 민심을 의식한 청와대와 정치권 탓도 크다. 증세는 절대 하지 말라면서 100조원이 넘는 복지 재원을 짜내라고 하고, 큰 그림 없이 여론 눈치만 살피다 보니 시류에 편승한 무리수 정책들이 나오는 것이다. 관료들이 소신 있게 정책을 펴도록 하려면 말로만 다그칠 게 아니라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주고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