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소각” 유언 거스르고 32년 뒤 햇빛… 나보코프의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

입력 2014-03-21 02:19


1977년 7월 2일,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스위스의 작은 휴양도시 몽트뢰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문제작 ‘롤리타’(1955)는 중년의 주인공 험버트가 의붓딸 롤리타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을 다뤄 외설시비에 싸였고 미국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래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일약 세계적 반열의 작가가 된 나보코프의 유품 중에는 몇 년간 써왔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작품의 초고도 있었다.

나보코프는 그 작품에 ‘오리지널 오브 로라’라는 제목을 붙였고 아내 베라에게 자신이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원고를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베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원고는 한동안 금고에서 잠들어 있었다. 베라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아들 드미트리는 10여 년 동안 대중과 평단에 이 작품의 존재를 심심치 않게 환기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원고 위작 소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던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마침내 2009년 11월, 드미트리에 의해 출간됐다.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나보코프가 원고지가 아닌 인덱스카드 138장에 집필한 그야말로 오리지널 초고이다. 따라서 소설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분량인지, 확정된 내용인지는 이제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창작의 비밀을 간직한 채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 작품엔 플로라라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작품의 화자와 사랑을 나누고 남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결코 누군가에게 소유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다. 흥미로운 것은 본문 중에 열두 살의 플로라가 집에 세 들어 살던 늙은 영국인 허버트 H. 허버트의 손길을 거부하며 비명을 지르는 장(章)이 있는데, 이 부분 역시 ‘롤리타’를 떠올리게 한다.

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 나보코프가 남긴 마지막 원고를 출판하면서 초고 상태의 인덱스카드를 스캔해 페이지 상단부에 싣고, 그 밑에 그 내용을 다시 인쇄체로 옮겨놓았다. 특히 드미트리가 쓴 ‘머리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의 인덱스카드 상자를 감히 열어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애정을 담아 배열하고 섞은 카드에 손을 대기 전에, 나는 먼저 숨이 멎어버릴 듯한 고통의 장벽을 통과해야만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에, 미완성임에도 전례가 없는 구조와 문체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태생의 나보코프가 길들인 영어라는 새로운 ‘가장 부드러운 언어’로 집필된 그 작품을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나는 카드 순서를 정해 정리한 다음, 믿음직한 비서인 크리스티안 갤리커에게 내가 읽어주는 대로 받아쓰게 해서 최초의 사본을 만들었다.”(‘머리말’)

이 작품의 가치는 독자들이 나보코프라는 거장의 몹시 사적이고 은밀한 창작 현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카드에 묻은 얼룩들과 지문들, 섬세한 문장가의 불완전한 문장들, 삭제 표시들, 오자들, 망설임과 고뇌의 흔적들, 그리고 점점 힘이 빠져가는 글씨까지.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는 20세기 거장의 글쓰기 과정을 유일하게 엿볼 수 있는 창인 셈이다. “교묘한 어떤 자세, 베개의 옴폭 들어간 어떤 부분, 이부자리의 어떤 주름 덕분에 내가 평소보다 좀더 명민하고 대담하게 느껴졌던 밤, 나는 얼룩이 진화하도록 그냥 두었다가, 가공의 벙어리장갑을 한 손에 끼고는 그 짐승을 그냥 문질러 지워버렸다.”(‘D5’로 표시해둔 카드에서)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