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건망증
입력 2014-03-20 02:48
베토벤이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의 한 극장에서 자신이 새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 서자 자신이 연주자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열정적으로 지휘를 해 청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베토벤은 산책을 나갔다가 저고리를 벗어놓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면도하려던 것을 깜빡 잊고 얼굴에 비누칠을 한 채 친구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으며 “누가 작곡했는지 참 아름다운 곡”이라고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했다.
에디슨은 은행에서 수납원이 이름을 묻자 생각이 나지 않아 집에 가서 문패를 보고 왔다는 일화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역무원이 다가오자 주머니를 열심히 뒤졌지만 차표가 없었다. 역무원이 천재 물리학자를 알아보고 차표를 안 내도 된다고 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계속 차표를 찾았다. 역무원이 재차 차표를 찾지 말라고 하자 그는 “차표를 찾아야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며 짜증을 냈다. 아인슈타인은 집주소도 자주 잊어버려 퇴근할 때 남의 집으로 들어가고,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에 전화를 걸어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독일어 시간에 배운 얘기 하나. 남편이 아침에 출근하는데 아내가 편지를 주며 우체통에 꼭 넣으라고 했다. 이 남자가 조금 걸어가자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편지 부쳤나요”라고 물었다. 그러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편지 부쳤는지를 물었다. 남자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한 사람을 붙잡고 왜 편지 부치라고 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남자의 등 뒤에 붙은 메모를 보여줬다. “제 남편이 건망증이 심하니 남편을 만나거든 편지 부쳤는지 꼭 물어봐주세요.”
건망증과 치매는 다르다는 게 의사들의 얘기다. 치매는 뇌세포 손상으로 발생하는 질병이지만 건망증은 나이가 들면서 뇌의 신경회로 기능이 저하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건망증과 치매를 구분하는 유머도 있다. 아내 생일을 잊어버리면 건망증, 아내 얼굴을 잊어버리면 치매다. 비자금 통장의 비밀번호를 깜빡하면 건망증이지만 비자금을 모아서 아내에게 갖다 주면 치매란다.
며칠 전 지하철 분당선 강남구청역 폭발물 소동은 가방 주인의 건망증 때문으로 밝혀졌다. 60대 남성이 작은아버지 유품 옷이 든 여행용 가방을 깜빡 잊고 승강장 의자 옆에 두고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의 얘기할 때가 아니다. 아침에 나오면서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슬슬 불안해진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