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설 목사의 시편] 떠남과 남김

입력 2014-03-19 02:50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들이 눈에 들어왔다. 깊은 산중이라 찾는 이가 없어 그런지 무덤의 형태가 많이 변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무덤은 봉분 위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사자(死者)는 이미 오래 전 가족들의 기억에서 잊혀 진 것이 분명했다. 그 무덤을 보는 순간 어느 작가가 남긴 유언이 생각났다. 작가는 “내가 죽으면 매장을 하되 무덤을 만들지 말고 대신 그 위에 과일나무 한그루를 심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10여분동안 ‘떠남과 남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무덤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남기려고 한다. 결국 인간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무덤이라는 모양으로 누구에겐가 계속 기억시키는 것이다. 무덤은 한 인간의 삶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symbol)적인 방법이다. 인간은 그 상징을 오랫동안 유지하려고 신비적인 요소를 더한다. 이를테면 “묘 자리가 좋으면 후손이 잘된다” “조상의 묘를 잘 돌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자기를 보다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만든 샤머니즘 같은 신비이다.

내가 그날 본 무덤의 사자는 가족들도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일이다. 무덤을 보면서 죽은 자는 산 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결국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은 예외가 없이 모두 잊혀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영원할 수 없는 육신과 업적을 위해 무모한 기억 행위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컴백(comeback)은 운동선수나 연예인들이 중단했던 활동을 ‘재개’ 혹은 ‘회복’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 컴백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 재기한다는 의미에서만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한다. 은퇴(隱退)를 선언했던 사람의 컴백은 자신의 명예와 업적을 퇴색시킨다. 떠남과 남김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욕망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떠남과 남김의 시간을 지혜롭게 선택하지 못하면 과욕이 된다.

아브람에게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것을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또한 떠남을 ‘잊어짐’과 ‘버림’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살아서는 고향에 가지 못했다. 풍요가 있었던 애굽 땅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훗날 유골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야곱은 ‘남김’에 성공한 삶이었지만 ‘떠남’에는 실패한 인생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남기거나 더 소유하려고 위선과 신비를 만들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떠남이 없고 남김에 매여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새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계절에 남김과 떠남의 의미를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주 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