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병권] 정치지리학의 운명
입력 2014-03-18 02:41
인문지리학의 한 분야인 정치지리학은 국가의 성쇠를 지리학적 환경이론 관점에서 논한 것이다. 러시아 같은 대륙국가와 미국 영국 같은 해양국가의 지정학적 우열을 주로 연구하며 해양국가의 우월적 지위에 주목한다.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1844∼1904)이 비조(鼻祖)로 불린다.
라첼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형 국가의 운명은 불확실하다. 힘이 강할 경우에는 대륙을 향해 도약할 수 있지만 약체일 땐 대륙국가에 제압당한다. 실제 우리는 대륙국가인 중국과 해양국가인 일본에 치여 제대로 기를 펴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요즘 관심의 핵으로 부상한 우크라이나도 우리와 비슷하다.
크림반도를 포함하고 있는 이 나라는 9세기 왕조국가를 처음 세운 이후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멸망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0년의 독립도 소련 붕괴 덕에 아무 희생 없이 줍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국가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와 서방의 전략적 관심을 이용하며 정권교체 때마다 한 쪽에 올인했다.
실각한 야누코비치는 티모셴코를 감옥에 보내고 자신의 지원세력이었던 올리가르히들과 어울리다 이권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러시아 전체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극소수 집단인 올리가르히는 소련 해체 이후 급격하게 부를 축적한 비윤리적 집단이다. 이들과 손을 잡은 정권의 운명이란 애초부터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미·소 냉전을 일찌감치 예견한 국제정치학자 브레진스키는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우크라이나 한국 터키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을 강대국의 이해가 충돌할 수 있는 지역으로 꼽았다. 국제전략가인 그도 한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가 분쟁 가능 국가로 꼽은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련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혼란과 폴란드의 쇠락을 잘 이용했더라면 동유럽의 강자로 부활이 가능했던 나라였다. 동로마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터키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정학적 위치가 불리하다고 해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결기가 있는 국가는 결코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다. 총리가 재벌 총수에게서 거액을 받는 비밀 녹음이 만천하에 공개된 터키와 우리는 다르다. 어떤 국가라도 국론통일과 사회통합, 지도층의 도덕성 확립이 담보되지 않으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점에서 한때 국제 전략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정치지리학의 주요 명제도 이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