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여왕’ 떠난 빙판 러시아 신예들 독주가 시작됐다
입력 2014-03-17 02:13
‘피겨 여왕’ 김연아가 2014년 소치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다. 김연아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아사다 마오(일본)도 이번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1980년대 말 아시아 출신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 이토 미도리(일본) 이후 여자 피겨계의 아시아세 독주시대는 당분간 막을 내릴 전망이다.
미도리 이후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여자 싱글은 일본계 크리스티 야마구치와 중국계 미셸 콴 등 아시아 혈통의 미국 선수들이 주름잡았다. 2000년대 후반이 되면서 아라카와 시즈카(일본), 안도 미키(일본), 아사다, 김연아 등 걸출한 선수들이 잇따르면서 아시아권의 초강세로 재편됐다. 특히 아라카와가 금메달을 딴 2006년 토리노올림픽 이후 지난 8년간 여자 싱글은 김연아, 아사다, 안도 트리오를 앞세운 아시아세가 정점을 찍었다. 이들 3인방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7차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무려 6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김연아와 안도가 불참하고 아사다가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2012년만 카롤리나 코스트너(이탈리아)
가 우승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을 끝으로 한동안 러시아 선수들이 여자 싱글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소치올림픽에서 러시아의 피겨 단체전 금메달을 견인한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와 편파판정 논란이 있지만 여자 싱글 금메달을 딴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8)는 러시아 독주의 서막을 알렸다.
원래 러시아는 구 소련 시절 대표적인 피겨 강국이었으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후 국가 주도형 선수 육성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됐다. 이 때문에 마지막 구 소련 교육 세대인 이리나 슬루츠카야가 2000년대 전반 여자 피겨를 이끈 뒤 오랫동안 상위 랭커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러시아 경제가 좋아지면서 선수 육성 시스템이 재건되기 시작했고, 소치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이후에는 관련 지원이 대폭 확대됐다.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리프니츠카야를 비롯해 소트니코바, 엘레나 라디오노바,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안나 포고릴라야, 나탈리아 오고렐체바, 세라피마 사하노비치,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 알수 카유모바 등이다. 이들은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 소녀들로 최근 3∼4년간 주니어 무대를 휩쓸었다.
이들은 시니어 무대에 올라와서도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그랑프리 파이널에는 6명의 선수 가운데 아사다 마오와 애슐리 와그너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러시아 출신이었다. 당시 소트니코바, 라디오노바, 포고릴리야와 함께 출전한 리프니츠카야가 아사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리프니츠카야는 지난 1월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다만 이 소녀들이 김연아나 아사다처럼 오랫동안 빙판을 지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자 선수들은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가면서 남자 선수들에 비해 체형 변화와 성장통으로 실력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러시아 소녀들 가운데 2011∼2012시즌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두 차례 우승하며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툭타미셰바는 최근 성장통 때문에 부진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
툭타미셰바처럼 탈락하는 선수가 나와도 러시아의 강세는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왜냐하면 이런 선수를 대체할 자원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 빙상연맹은 오는 26∼30일 세계선수권대회에 소트니코바 대신 포고릴리야를 리프니츠카야와 함께 내보내면서 “새로운 올림픽 주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논란의 금메달을 딴 소트니코바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더욱 문제를 키우기보다는 다른 선수들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트니코바의 경우 최근 코치가 인터뷰에서 “소트니코바는 피겨 코치가 되길 원한다”고 말해 은퇴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워낙 선수들이 많다 보니 러시아 내의 경쟁에 밀려나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주니어 시절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적어도 몇 번의 메달을 차지했던 안나 오브차로바(17)는 스위스로, 폴리나 쉘레펜(18)은 이스라엘로 귀화했다. 최근 스위스와 이스라엘에 각각 피겨 국제대회 최초의 메달을 안겨준 이들은 4년 뒤 평창올림픽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아시아세가 쇠퇴한 여자 싱글에 비해 남자 싱글은 최근 아시아세가 위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번 소치올림픽에서 남자 싱글 포디움에 하뉴 유즈루, 패트릭 챈, 데니스 텐이 나란히 선 것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뛰어난 점프와 표현력을 가진 하뉴(일본)의 장기 집권이 예상되는 가운데 중국계 캐나다인 챈, 한국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카자흐스탄의 텐이 한동안 왕좌를 놓고 싸울 전망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