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칼럼] 사륜구동의 사회로

입력 2014-03-15 02:14


요즈음 자동차 기술의 진화가 세간의 화제다. 후륜구동은 대부분 승차감에서 월등하고 속도 내기에도 좋아 주로 고급 승용차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눈 오는 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서 길이 살얼음만 얼어도 쉽게 미끄러지고 나지막한 언덕길도 잘 오르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이란다.

필자의 현재 차량도 후륜구동이라서 이런 걱정에 익숙하다. 헌데 전에 타던 전륜구동 차량은 눈이나 얼음 언 길가 이동에 훨씬 좋았다. 그리고 연비도 상대적으로 좋았다. 물론 모든 게 전륜과 전면 엔진 부위에 집중된 터라 승차감이 떨어지고 운전대에 무게가 너무 나간다는 느낌도 있었다. 운전자라면 모두가 다 아는 상식이다.

이 둘의 종합을 긍정적으로 수렴한 사륜구동 차량이 이제는 대량화, 시장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물론 아직은 고급 승용차부터라 조금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허나 결국에는 이런 추세로 가면 안전과 효용 모두 충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차량의 선진화임에 틀림없다. 하이브리드 엔진 그리고 점증하고 있는 전기충전차량 생산 등과 합류한다면 크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전륜과 후륜이 합하여 동시에 굴림 작용을 한다면, 언덕과 내리막길을 전륜이 끌고 후륜이 밀어주면, 빗길과 언 길에서 두 바퀴가 아닌 네 바퀴가 앞뒤좌우로 다양한 힘을 발휘하여 동시에 제동을 건다면, 그것은 차량과 승객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아쉬움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권의 평화적 교체는 주인인 국민이 결정하는 당연한 결과다. 차별화된 선거 공약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권정당 나름의 전륜정부나 혹은 후륜정부를 소신껏 이끌어갈 자유와 동시에 책임이 있다. 그리고 다음 선거 때 국민의 심판을 받으면 된다. 단 정당적, 정치공학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국민 전체와 국가 차원의 관심사의 경우에는 사륜구동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 예를 들어 통일, 국제외교, 지역화합 문제 등의 과제에 관한 한 집권당은 전륜에 서고 야당은 후륜에 위치하여 국가와 국정을 안전과 행복으로 곧 평화와 정의로 이끌고 가야 한다. 사륜구동이라는 그런 선진의 길을 우리 모두는 함께 가고 싶어 한다. 비용이 조금은 더 들면 기꺼이 낼 것이다. 그것이 사는 기쁨이니까. 전임과 후임 지도자가 전륜 후륜의 바퀴가 된다면야 얼마나 국민이 기쁘겠나.

한국 기독교회의 지도력이 사륜구동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교회연합기관은 기본적으로 공공의 봉사기관이다. 신자 한분 한분이 이 땅에서 축복받고 하늘나라에서도 구원의 축복을 받으려, 자기 스스로의 헌신과 진정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면 된다.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신앙의 동지들과 사랑의 연대를 통해 진정한 신앙으로 함께 성숙하면 된다. 그런 일을 위해 교회연합체나 기독교 연합기구가 구성될 필요는 없다. 연합기구는 신앙인 혼자서는, 개교회 혼자서는, 개교단 홀로는 수행하기 힘든 일들, 말하자면 교회의 대사회적 정책이나 봉사활동, 대정부적 발언이나 참여 등과 같은 공공의 일을 같이 하려는 이유 때문에 생긴다. 왜 개인 구원의 문제를 WCC나 WEA가 관심을 표명하지 않느냐고 물을 필요도, 가치도 없다. 세계 공공의 문제를 잘하라고 비판하고 격려함이 옳은 일이다.

그렇다면 정권의 영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의 기독교 기관 역시 ‘한국 기독교’의 공공적이며 집단적 위상과 공헌을 두고 과거 지도층과 현재 지도층이 역사적으로 신앙적으로 전륜과 후륜이 합한 계승과 창조의 사륜구동 체제를 속히 가동시켜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선진이고 싶다. 선교와 봉사, 일치와 화합의 선진이고자 결단하고 싶어 한다. 필요하면 같은 신조와 신앙을 고백하면서 보수와 진보가, 진보와 보수가 한국교회의 선진적 공동체 형성을 전제로 전륜 역할과 후륜 역할을 번갈아가며 ‘사륜구동 기독교’를 만들 시기가 왔다. 하강하며 바닥치려는 지금이 바로 그런 결단의 ‘때’라고 믿는다.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