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독립, 온전한 연합… 왜 전덕기인가?

입력 2014-03-13 20:10 수정 2014-03-14 03:39


전덕기 목사 소천 100주기 추모식 및 학술대회 개최

전덕기목사서거100주기추모사업회(회장 서철 목사)는 13일 서울 중구 퇴계로 충무아트홀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덕기 목사 서거 100주기 추모식 및 학술대회’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음전파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 목사의 뜻을 되새겼다. ‘전덕기, 왜 전덕기인가’를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선 민족운동 활동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전 목사의 목회와 신앙 등을 되돌아보는 논문이 발표됐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의 ‘전덕기의 목회와 신학사상’ 논문에 따르면 외아들인 전 목사는 아홉 살 때 고아가 됐다. 부모가 1884년 세상을 떠난 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숯장사를 하던 삼촌의 양자가 됐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8년 뒤 스크랜턴 선교사가 운영하며 사역하던 남대문 시약소(가난한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던 곳)에서 일하며 복음을 접했고 세례를 받았다.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있던 전 목사는 남대문시장 상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큰 열매를 맺었다. 1902년 416명(주일학생 포함)이던 교인 수는 3년 뒤 658명으로 늘어났다. 1907년 상동교회 담임목사를 맡았고 5년 만에 교인 수가 3000명에 달할 정도로 부흥했다. 이 교수는 “전 목사의 개인적 지도력 때문”이라며 “학식이 없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가 큰 감동을 줬다”고 설명했다.

전 목사는 결핵으로 쇠약해진 뒤에도 사역을 쉬지 않았다. 1913년 6월 교파마다 다르게 지키던 추수감사절 날짜를 통일시키자고 제안했다. 가난한 상인들의 장례를 치러주던 그는 기독교인을 위한 장지를 마련하는 일에도 힘썼다.

논문 발표자들은 ‘낮은 사람들과 함께 한 실천적 신학’이라고 전 목사의 목회 활동을 요약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인 뒤 당시 만연했던 반상의 차별을 깨고 상동청년학원 등을 통한 계몽 활동을 벌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몸을 던진 그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1914년 3월 상동교회에서 치러진 전 목사의 장례식에선 그를 따르던 시장 상인과 교인 등의 추모 행렬이 장사진을 이뤘다. 전 목사의 장손자인 전영일(75) 장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전해들었는데, 할아버지는 늘 소통하고 섬기는 데 애쓰셨고 ‘소외된 이웃을 도우라’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신민회를 창립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선 공로로 전 목사를 ‘이달(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으며, 이날 추모사업회에 기념패를 전달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