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사회적 관계 끊고 익명 공간선 접속… ‘곁’ 이 사라진 일그러진 자화상
입력 2014-03-14 01:37
엄기호/창비/단속사회
우연히 접한 지인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고 놀란 적이 있는가. 늘 깍듯하지만 좀처럼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멀게만 느껴지던 지인이 페북에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나 다정한 어투로 시시콜콜 소개하고 있는 모습에 말이다. 평소 내뱉지 않던 회사나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은 물론 정치적인 언사까지 과감히 적어놓은 모습은 또 얼마나 낯설던지. 게다가 그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모를 이들이 수두룩하게 ‘좋아요’를 눌러놓은 장면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아니 그와 나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문학자 엄기호는 이런 한국 사회를 ‘단속사회’라는 틀을 통해 들여다본다. “남을 믿지 않고 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단속하는 사람들이 SNS니 ‘취향의 공동체’니 하는 곳에는 중독차처럼 접속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처한 문제는 관계의 전면적 단절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 접속하고 언제 누구와는 단절하는 게 아닐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그 때 떠올린 단어가 ‘단속’이었다. 그가 말하는 단속은 자기를 단속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지칭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단속하며 살게 된 걸까. 저자는 13일 전화 인터뷰에서 “작은 실수 하나로도 어떤 형태로든 공격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갖게 됐다”며 “가령 온라인 등에서 별 것 아닌 일로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공격당해야 하나’ 생각하지만 동시에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더 이상 공론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긍정적인 경험의 부재는 ‘어차피 안 된다’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낳았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 구성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며 “그 누구도, 심지어 국가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끔찍할 정도로 ‘곁’이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가족은 물론 또래 집단, 직장, 지역사회가 하나같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자신의 곁을 지켜줄 존재를 찾지 못한다. 무언가 아픔과 상처를 호소하고 싶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힐링’이나 상담 같은, 사적인 것을 더 사적으로 취급하고 소비하는 시장이다. 또 지극히 사적인 것만 중시하고 존중하는 취향의 공동체가 그 공간을 메우면서 각자의 상처와 고통은 더 이상 공적 담론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됐다. 내 ‘곁’을 내 ‘편’으로 채우는 순간 더 이상 옳고 그름은 의미가 없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은 무조건 반대하면 그만이다. 반대당하는 사람은 그런 반대에 대해 “그건 네 취향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면 그 뿐.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친구를 보며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선 분노를 표출하지만 정작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입 다물고 외면하는 행태로 나타난다. 직장인도 비슷해서, 부당 해고 같은 문제에 내 편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연결된 사이버 공간에서는 여과 없이 감정을 드러내지만 직장 내부에선 정작 침묵한다.
그동안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등을 통해 성장과 소통이란 주제에 주목해온 저자의 관심은 사적인 관계의 붕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특히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만 말할 줄 알지 남들도 들어줄만한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전환해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말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듣는 능력’도 잃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호소를 ‘징징거림’ 그 이상으로 듣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가 스스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입증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일어난 세 모녀 사건과 연일 신문 지상을 채우는 왕따 등 가혹 행위로 인한 학교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경청의 행위’를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경청이란 그저 잘 들어주는 행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성장하는 행위다.
“가령 학교폭력을 견디지 못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학교 현장에서는 다같이 애도하며 그 죽음을 ‘사회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반대로 ‘동요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방송을 틀면서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는 게 현실이죠. 학교에서부터 ‘경청’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공론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