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왜 WP 1면에 ‘별그대’가…
입력 2014-03-13 01:35
얼마 전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1면에 보도했다. 인터넷판에서는 1면 톱뉴스였다. 전지현과 김수현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썼다.
궁금증이 확 밀려왔다. 왜 WP가 이 기사를 1면으로 꺼냈을까? 문화면 톱이라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인터넷 아시아판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면 1면 톱기사 바로 아래 3단 제목이 붙었다. 프리랜서를 포함해 기자 수백명이 매일 1면에 기사를 넣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가 WP다. 콧대가 워낙 높아 웬만한 미국 내 로컬 뉴스는 1면 근처에도 못 간다. 세계를 경영하는 나라의 최고 권위지답게 1면은 늘 글로벌 이슈로 장식한다.
한류 열풍을 미국이 인정?
‘별그대’를 다룬 기사의 제목은 ‘한국의 드라마가 중국의 모범이 될까’이다. 인터넷판 제목은 ‘중국 관료들이 왜 한국만큼 좋은 드라마를 못 만드는지 토론하다’이다. 제목을 보면서 일단 이해가 됐다. ‘별그대’나 한류(韓流)가 아니라 중국 양회(兩會)를 다룬 기사다. 주제는 1면거리다.
기사에도 언급돼 있지만 자연스럽게 ‘쿵푸팬더’ 사건이 떠올랐다. 드림웍스가 2008년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쿵푸팬더를 내놓았을 때 중국의 ‘팬더예술가’ 자오반디는 “팬더는 중국의 것인데 미국이 악의적으로 묘사하고 조롱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인민일보는 “미국이 중국 고유의 문화 소재를 약탈해 문화식민을 도모한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 제목은 ‘쿵푸팬더와 문화침략’이었다.
논란은 2011년 쿵푸팬더2가 나왔을 때 다시 불붙었다. 자오반디는 보이콧을 선언했고, 쿵칭둥 베이징대 교수는 “신성한 무술인 쿵푸를 중국의 국보 1호 팬더를 이용해 폭력적인 무술로 묘사했다”고 동조했다. 보이콧 운동은 보수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었다. 중국 시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드림웍스는 결국 2012년에 “쿵푸팬더3은 중국이 지분의 55%를 가진 미·중 합자회사에서 만든다”고 발표했다. 중국 협력사는 상하이미디어그룹, 차이나미디어캐피털같이 중국 정부가 소유한 기업들이다. 쿵푸팬더를 ‘메이드 인 차이나’로 만들면서 실리와 명분을 주고받는 절묘한 바꿔치기가 이뤄졌다.
이런 맥락에서 ‘별그대’는 WP의 1면에 장식하기에 충분한 기사다. 미국은 중국에 묻고 있다. “쿵푸팬더가 문화침략이라고? 한국 드라마는 어떤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별그대 때문에) 우리는 문화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토로가 나왔다는 팩트를 전달하면서 WP는 중국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던 것이다.
니알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는 2007년 ‘차이메리카’(차이나+아메리카)라는 말을 만들었다. 전 세계 인구의 25%, GDP의 30%를 차지한 차이메리카의 협력 여부가 글로벌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게 퍼거슨의 생각이다. 실제로 미국 금융위기 이후 세계질서는 ‘G2 체제’로 급속히 재편됐다. 경제적으로도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함께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문화침략’ 주장 한껏 조롱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가치충돌이다. 미국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지구촌 곳곳에 개입한다. 이라크 전쟁을 스스로 침공(invasion)이라고 부르는 것도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한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에 미국은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된 문화적 미성년자일 뿐이다. 중국은 이미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역사 속에 배어 있는 문화와 전통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 지정학적으로 중간에 낀 우리가 “중국 내 한류 열풍을 미국도 인정했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닌 것이다.
고승욱 온라인뉴스팀장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