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춤추네” 변산아씨의 숲속 무도회… ‘야생화의 고향’ 부안 변산반도국립공원

입력 2014-03-13 01:34


언 땅을 뚫고 피어난 봄꽃들이 풀 한 포기 없는 갈색 숲에서 무도회를 연다. 발레리나의 허리처럼 가녀린 꽃줄기에 매달려 하늘하늘 춤을 추는 봄꽃은 노란색 복수초와 분홍색 노루귀, 그리고 ‘변산아씨’로 불리는 하얀색 변산바람꽃이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수줍은 표정의 봄꽃이 한 줌씩 무리지어 어둑어둑한 숲에서 화려한 무도회를 펼치는 곳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일대.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을 쓰면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을 두고 ‘남도 답사 일번지’를 저울질했을 정도로 변산반도는 자연과 문화가 깊이와 무게를 지닌 곳이다. 서해쪽으로 돌출한 변산반도는 안쪽 산악지대를 내변산, 새만금방조제에서 곰소항에 이르는 서해바다 주변을 외변산으로 부른다.

내변산의 중심인 변산의 산과 골짜기는 해발 400∼500m로 낮은 편이나 최고봉인 의상봉(509m)을 비롯해 쌍선봉, 낙조대, 월명암, 봉래구곡, 직포폭포, 부안호 등이 기기묘묘한 절경을 자랑한다. 99㎞ 길이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채석강, 적벽강, 격포항, 곰소항의 자연생태계도 잘 보존돼 변산반도 전체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아름다운 산하는 문인부터 불러 모은다. 고려의 문신 정지상을 비롯해 조선의 서거정, 김종직, 김시습 등이 절경에 이끌려 부안을 찾았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체게바라’가 되기를 원했던 허균은 파직당한 후 부안으로 내려와 선계폭포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위치한 정사암에 머물며 ‘홍길동전’을 창작했다. 성리학의 폐단에 분노한 조선 중기 실학자 유형원도 내변산과 외변산의 길목에 위치한 우동리에 19년 동안 머물며 ‘반계수록’을 완성한다.

봄에는 야생화가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드는 고장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하나 전해오지 않을 리 없다.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조선시대의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는 이매창(李梅窓)이 그 주인공이다. ‘매화가 핀 창’이라는 뜻의 호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이계생. 조선 선조 때 부안현 현리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천애의 고아가 되면서 부안현청에 기적을 올린다. 그리고 시인이자 선비인 유희경을 만나 변산반도의 산하를 주유하면서 시를 짓고 때로는 거문고를 탔다.

하지만 28세 연상인 유희경과의 만남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매창은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는 시로 애끓는 심정을 전했다. 유희경은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이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라는 시로 화답했다.

매창이 지은 수많은 시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는 ‘이화우(梨花雨)’를 비롯해 58편으로 목가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신석정(1907∼1974)이 번역했다. 부안이 낳은 대표적 시인인 신석정은 자연과 민족, 민중을 소재로 주옥 같은 시를 남긴 인물. 특히 1967년 발표한 ‘산의 서곡’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으로 100여 종의 꽃이 등장한다.

‘아무도 범할 수 없는 한 모퉁일/ 갈매빛 준령이 달려 나갔다/ 하늘도 나직이 떠도는 들에/ 노루귀 빨간 꽃바람에 사운대고/ 해도 한나절 겨워 가는 들 건너/ 은빛 바다가 넘실거린다’(신석정의 ‘다시 들길에 서서’ 중에서)

신석정이 노래한 숱한 꽃 중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는 노루귀이다. 2월 중순부터 4월까지 피고 지는 노루귀는 잎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꽃은 분홍색, 흰색, 청색으로 꽃받침과 꽃줄기를 수놓은 솜털이 신비로운 노루귀는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분소 인근의 자연관찰로 주변과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 숲에 무리지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봄꽃 중에서도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알려진 복수초(福壽草)는 글자 그대로 복 많이 받고 오래 살라는 축복의 뜻이 담겨 있는 야생화. 한낮에는 노란색 꽃잎이 벌어지고 밤에는 꽃잎이 오므라드는 복수초는 한겨울 눈을 뚫고 핀다고 해서 ‘봄의 전령사’로 불린다.

원일초, 설련화, 얼음새꽃으로도 불리는 복수초는 내소사 청련암 주변에 군락을 이루고 있으나 내소사 입구 민박집의 화단 ‘정든 소공원’에도 한 주먹씩 피어있다. 민박집 주인이 장독대를 비롯한 화단 구석구석에 복수초를 심은 까닭은 이른 봄에 부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꽃을 보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변산반도를 대표하는 야생화는 단연 변산바람꽃이다. 내변산을 비롯해 한라산, 지리산, 마이산 등에 자생하는 변산바람꽃은 한국 특산종. 1993년에 전북대학교 선병윤 교수가 변산반도에서 채집해 발표하면서 발견지인 변산이 학명으로 채택됐다.

수술이 푸른색을 띠는 변산바람꽃이 군락을 이룬 곳은 변산반도국립공원 내변산분소 인근의 자연관찰로 주변. 훼손을 우려한 국립공원에서 별도로 변산바람꽃 군락지를 만들어 탐방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금지된 사랑’ ‘사랑의 괴로움’ ‘덧없는 사랑’ 등 꽃말마저 애달픈 변산바람꽃은 이매창과 유희경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아쉬워하듯 내변산 그늘진 숲에서 청초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변산바람꽃이 지고나면 얼레지 산자고 등이 해맑은 모습으로 변산을 수놓는다.

부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