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설 목사의 시편] 서로 먼저 해야할 일

입력 2014-03-12 01:34


‘서로’는 짝을 이루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로 상호작용과 교제(koinonia)를 의미하는 단어다. 서로라는 관계 속에서 우리가 이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복종하는 것 등 셀 수 없이 많다. 행복하려면 기쁨과 슬픔, 고통과 어려움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 이는 소통, 사귐, 연합, 물질을 나누는 것까지 포함하는 코이노니아를 통해 이뤄진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공동체에 소속감을 갖는 것은 큰 복이다.

우리 교회는 매년 정월 대보름쯤의 주일을 ‘우리 옷 곱게 입는 날’로 정했다. 이 날은 온 교우들이 함께 우리 옷을 입고 민속놀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교우들이 어울리는 모임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교회의 평화. 갈등과 경쟁이 많은 세상은 평화가 없다. 시편 저자의 말처럼 “서로 연합하여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시133:1)를 이뤄 가야 한다. 평화로워야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야 평화가 온다.

둘째, 지역사회 관계.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의 갈등이 많아 잘 싸운다. 그래서 교회는 문화라는 수단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며 지역사회를 통합해 가야 한다.

셋째,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 옛것은 낡고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와 삶의 내용이 담긴 지혜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바뀌는 현실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않고도 일이 이루어지는 데서 시작된다. 고속도로를 통과해도, 열차표나 비행기표를 사도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계와 일하는 시대가 됐다. 화상통화나 화상업무는 감정이 없는 허상을 보며 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문자 메시지는 편리한 의사전달 수단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자기의사를 신속히 전달할 수 있지만 일방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내 생각을 던져놓으면 그만이다. 상대방이 응답하기 전에는 어떤 교감도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방도 응답할 가치가 없으면 무시해버린다. 이것이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시대, 디지털 시대의 한계이며 약점이다. 요즘 카페에 가 보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이처럼 관계 단절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16:20)고 말씀했다. 거룩한 입맞춤은 애정과 존경, 평화와 하나 됨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서로’가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아름다운 관계를 위한 중요한 원리다.

<여주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