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기적
입력 2014-03-12 01:32
그렇다. 그건 참 기적이다. 뇌수술 후 스물일곱 때부터 항경련제를 먹어왔는데, 물론 아직도 하루 두 번씩 먹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먹으라는데 내가 별일 없다는 것은 말이다. 그것도 딜란틴이라는 독한 항경련제로부터 바리움을 거쳐 테그레톨 등 무수한 종류들을 먹었는데도 별일이 없었다. 그동안 대경련 한번 일으키지 않았다. 참 기적이다.
그래서 한때는 두뇌 활동을 해야 하는 내가 기억력이라든가 집중력이 나빠지면 안 될 것이라는 걱정에 빠져 두뇌활성제를 같이 먹기도 하였다. 나의 책상엔 짐작할 수 없는 앞날의 걱정들 때문에 몸의 부위마다 효과적이라는 약병이 죽 놓이기도 했다. 가끔 간 검사, 뇌 검사를 하는데 어느 해인가의 뇌 촬영에선 운동과 균형을 관장한다는 소뇌(小腦)가 정상보다 훨씬 작아진 것이 판명되었다. 가끔 넘어지는 것이 바로 그 소뇌 탓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몇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급기야 수술을 하게 되었고 며칠 입원하게 되었다. 더구나 며칠 후엔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지라 혼자 속을 끓였다. 그때 마침 이사했었으므로 누군가의 말처럼 잘못 이사가서 그런 것은 아닐까, 라고 극도로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퇴원하자마자 깁스를 한 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선반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발가락이 부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또 입원하게 됐고, 이번에는 발가락 깁스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운(運)탓, 집 탓을 하며 한참 화를 내고 있던 뒤끝에 나는 새로운, 그러나 아주 낯익은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넘어져 손목뼈가 부러진 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약 때문이 아니라, ‘이사’ 때문은 더욱 아니라, 내가 나의 능력 이상으로 빨리 가려고 했던 것에서 일어났으며, 분노는 ‘발가락 부러짐’이라는 다음의 분노를 낳았다는 것을.
부정은 끊임없이 부정을 낳을 것이라는 것과 내가 부정하고 분노하는 한 부정과 분노는 끊임없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나는 긍정으로 마음을 돌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음을 발견했다. 긍정의 힘은 곧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게’ 넘어졌는데도 손목의 골절 같은 작은 부상밖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더 단단한 물건이 떨어져 발뼈 전체가 으스러졌다면 어쩔 뻔했나…하는 등의 생각들. 그렇다. 모두 참 기적이다. 당신과 내가 여기 함께 있다는 것, 정말 기적이다.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