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3·11로부터 3년, 반전 기대했건만
입력 2014-03-12 01:32
“일본의 재부상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구현에 스스로 앞장설 때 비로소 실현될 것”
따뜻한 봄날 금요일 오후였다. 휴가를 얻은 김에 산행을 하고 내려왔는데 산 아래는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TV에서는 거대한 검은 쓰나미가 해안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의 참상, 경악 그 자체였다.
일본의 지인들이 걱정돼 전화를 걸어봤지만 모두 불통이었다. 회사로부터도 특별취재팀을 꾸려 토요일 아침 현지로 출발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하루 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터지면서 취재 방향도 바뀌어야 했다. 재해 현지 체류가 어렵게 된 만큼 이번 재난의 의미와 향후 수습 과정에 취재의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부랴부랴 도쿄로 들어갔다.
지진·쓰나미·원전사고라는 3종 복합재해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진 직후 후쿠시마 원전을 둘러본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는 “원전은 아무 탈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 말 직후 원자로의 격납건물 지붕이 폭발하고 말아 체면을 구겼다.
3·11은 엉뚱하게도 정부의 리더십 위기로 번졌다. 특히 중앙정부의 굼뜬 대응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쿄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일 정도로 일본 정부는 생필품 공급애로 타파에 적잖은 시간을 써야 했다. 그런데 재해지역 주민들은 무서우리만큼 차분했다.
중앙정부의 문제는 매뉴얼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재해 탓이라고 해도 재해지역인 도호쿠(東北) 사람들의 차분함은 역사적, 구조적인 배경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메이지유신 직전 막부체제가 무너질 때 이 지역 사람들은 끝까지 막부를 지지하다 결과적으로 중앙으로부터 천시당하는 삶이 고착됐고, 산업화 이후에는 도쿄의 예속지역으로 뿌리내렸다.
기존의 도농 간 격차 문제도 있는 데다 원전 건설지역으로서 대도시 도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차별지역으로 남았던 것이다. 엄청난 재해 속에서도 무표정하고 담담한 그들의 얼굴엔 이 지역 사람들이 걸어온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들의 소리 없는 웅변은 지금까지의 상호 대립·갈등적 관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선진국 일본의 에너지 과소비형 도농격차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자연친화적인 삶을 환기(喚起)하는 문명사적 전환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보였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움직임을 뒤늦게 간파했는지 원전 폐기,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 극복 등을 말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일본은 보유 원전 총 54기 중 35기가 작동되고 있었는데 사고 직후 모든 원전을 세웠다. 추가 원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정비가 이유였지만 원전 활용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하자는 데 초점이 있었다. 간 나오토 정부가 마침내 원전 폐기를 시사하자 사람들은 3·11의 전화위복이 시작됐으며 그것은 바로 탈원전으로 나타났다고 봤다.
장기불황에 빠져 있던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힘을 잃고 위축되는 모습만 보여 왔다. 그런데 탈원전 실험과 더불어 에너지 다소비형, 도농 대립 구조를 극복하고 자연친화적 사회를 지향한다면 후기 산업사회의 여러 문제점 극복을 실천하는 대안 모델로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되레 2012년 12월 원전 지지파인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민주당을 밀어내고 다시 등장했다. 게다가 아베 정부는 장기침체와 복합재해에 빠진 일본사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며 우경화 노선 총결집을 외쳤다. 그 결과가 지금의 한국, 중국과의 대립이다.
3·11은 침체에 빠졌던 일본이 회생으로 반전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와중에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 에너지 절약형 세계를 그려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멈춰선 원전의 재가동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원하는 자랑스럽고 훌륭한 일본의 재부상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 구현에 앞장설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음을 지금이라도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3·11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용래 수석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