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에쿠우스’ 17세 알런役 파격 캐스팅 지현준 “욕망·이성의 충돌 이해할 나이”

입력 2014-03-11 01:31


연극 ‘에쿠우스’가 14일 서울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막이 오른다. 라틴어로 말(馬)을 뜻하는 이 작품은 1973년 영국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공연되는 화제작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극작가로 불리는 영국의 피터 쉐퍼 작품으로 여덟 마리 말의 눈을 찌른 17세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진 욕망을 파헤친다.

국내에선 고(故) 강태기, 송승환, 최재성, 최민식, 조재현 등 최고 남자 배우가 20대에 알런 역을 거치며 스타로 발돋움했다. 강태기 주연으로 1975년 국내 초연했던 실험극장이 창단 54주년을 맞아 다시 올리면서 새로운 알런에 도전한다. 30대 중반의 배우 지현준(36)이라는 파격적(?) 캐스팅을 통해 그동안 소년 알런 이미지에서 벗어나 남성적 이미지를 강화한 것이다.

지난 7일 서울 동숭로 연습실 인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주변에서도 기대 섞인 염려를 많이 한다. 그래도 ‘한 번 보고 싶긴 하다’고 하니 감사하다”며 웃었다. 그는 키 179㎝에 단단한 근육질 체형, 중저음의 목소리를 지녔다. 알런 역할의 오디션 지원 자격이 ‘키 170㎝ 이하, 20대 남성’이었음을 떠올리면 이런 파격이 없다. 본인이 인정하듯 약간 말(馬)상의 얼굴은 오히려 극 중 말 역할에 어울리는 느낌이다. “대본 어디에도 소년이 작고 여리하다는 말은 없어요. 말을 찔러야하니 말과 소년이 대비되는 게 이미지적으로 좋을 수 있겠죠. 반면 제가 가진 이점이 있지 않겠어요?”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기 정말 어려운데”라며 머리를 잠시 쥐어뜯더니 이내 답을 내놨다. “8년 전 신앙을 갖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알게 됐어요. 그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현실화해서 보이는 증상들, 그 깊이가 어디까진지 알게 된 거죠.” 극 중 광신도적인 어머니와 억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던 알런이 신과 종교에 대해 혼란을 겪고, 말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그는 17세 소년이 등장하는 여러 작품을 보면서 ‘젊은 척’은 답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사무엘 울만이 쓴 ‘청춘’이란 글을 보니 청춘이란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해요.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 신선한 정신. 그래, 나는 나대로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신체적 나이로는 불리하지만,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신과 인간, 섹스라는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볼 나이가 됐다는 점은 오히려 이점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의 심연에 자리 잡은 광적 욕망이 이성과 충돌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생각이다.

그의 연기 인생은 2003년 이윤택 연출가의 ‘연희단거리패’를 찾아가면서 시작됐다. 하나씩하나씩 밑에서부터 배워나갔다. “작업을 하면서 내 속에 있는 것 중 꺼내기 싫은 건 꺼내야하고, 꺼내기 좋아하는 건 가짜라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병원에 몇 번씩 실려갔어요. 그런데 정말 좋은 작품은 하나씩 제 꺼풀을 벗겨내고 괴롭게 한 작품들이더군요.”

지난 10년간 영화나 연극에 간간이 얼굴을 내밀었지만 주목받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 강량원 연출가를 믿고 1인 35역을 소화했던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로 각종 신인상을 받았고, 국립극장이 야심차게 내놓은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역을 맡으며 전석 매진이란 기록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뒤늦은 성공에 혼자 욕심을 낼 법 한데, 그는 말끝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춰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도 이한승 연출가와 알런에 대한 해석이 많이 달랐지만, 대들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면서 괴롭지만 서로 맞춰가는 과정을 거쳤다.

“저마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작품 하나를 위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연극이에요. 그렇게 무대에 올린 작품에서 저와 상대 배우와 관객이 똑같이 그 공간을 공유하는 순간이 있어요. 끝나고 박수 받을 때 느끼는 짜릿한 기쁨이랑은 차원이 다른 기쁨의 순간이죠.”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