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1부) 자살 바이러스의 백신을 찾아라] 5. 코드 F의 공포
입력 2014-03-10 01:55
“정신병자 낙인찍힐라” 자살시도자·가족, 상담조차 거부
“됐으니까 내 진료기록 모두 삭제해 주세요.”
지난해 말 강원도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주부 A씨(43)가 실려 왔다. 재혼한 남편과 자식 대학 진학 문제로 싸우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자 다량의 진통제를 복용한 상태였다.
의료진은 서둘러 A씨의 위를 세척한 뒤 3일간 입원토록 했다. A씨가 자살을 시도한 다음 날 상담사(사례관리자)가 찾아가 정신의학과 외래진료를 포함한 치료 프로그램을 설명했다. 이혼 경력과 불안정한 재혼 생활 등에 비춰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서다.
상담사의 간곡한 설득에 A씨는 마음을 열고 서비스 동의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퇴원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그는 병원에 찾아가 의료진에게 “치료 프로그램이고 뭐고 내 진료기록을 모두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신의학과 상담을 하면 진료기록이 남는다던데, 이 좁은 동네에서 ‘정신병자’라고 소문나면 병원이 책임질 겁니까?” 워낙 완강한 A씨 태도에 상담사도 결국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딸은 치료를 반대했다
“차라리 나가서 사라져 버려.”
지난해 10월 경기도의 대학병원 응급실에 김승현(가명·18)군이 실려 왔다. 소화제·진통제 등 집에 있던 알약을 무작정 입에 털어 넣었다. 두 달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는 승현이에게 심기가 불편했던 아버지가 이날 폭언을 했다. 하필 여자친구도 비슷한 시각에 이별을 통보했다. 승현이가 자살을 시도한 건 두 달 사이 벌써 두 번째였다.
승현이는 의료진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의료진은 승현이를 퇴원 후에도 계속 치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그는 “내 아들을 정신병자 취급하지 말라”며 버럭 화를 냈다. 이어 “우리 아들은 잠시 청소년기 방황을 한 것이지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기록이 남지 않는 한의원에서 스트레스 관리를 하겠다”며 상담마저 거부한 채 승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심장병을 앓고 있던 최순덕(가명·70) 할머니는 가족들이 자살 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였다. 홀로 아파트에 살던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한 달 치 심장병 약을 한꺼번에 먹었다. 응급조치로 다행히 생명을 건졌지만 할머니는 삶에 애착이 없었다. 자살예방센터 상담사들에게 “약에 의존해 연명해 봤자 자식들에게 짐만 될 것 같다”고 여러 번 털어놓았다.
상담사들은 할머니를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와 연계해 장기간 관리하고 치료하려 했다. 할머니도 딸 같은 상담사들의 진심어린 말에 결국 동의했지만 정작 딸의 반대가 거셌다. 할머니의 딸은 “심장이 안 좋아서 약을 실수로 많이 먹은 것이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니 상관 말라. 정신 병력이 남으면 안 된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할머니를 치료했던 대학병원 관계자는 9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어머니의 우울증이 드러나면 자식들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고 비난받을까 봐 치료를 거부한 것으로 본다”며 “자살 시도를 했다고 모두 정신과 질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치료가 필요한지 아닌지 진료를 받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코드 F의 공포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정신의학과 질환의 진료기록에 표기되는 ‘F’란 글자다. 정신의학과에서 환자를 진료한 뒤 건강보험료를 청구할 때 ‘F’란 분류코드가 붙는다. 이를 ‘정신병자 낙인’으로 생각해 진료 자체를 기피하는 것이다. 자살 시도자는 일시적으로 신체가 회복돼도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으면 다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 사회적 ‘낙인’ 탓에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많다.
인제대 부설 일산백병원이 지난해 9∼12월 응급실에 온 자살 시도자 91명을 상대로 ‘자살 시도 이후 정신건강 치료를 받지 않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난다. 45명은 ‘자살 시도와 정신건강의 연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28명은 ‘정신의학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을 꼽았다. 여전히 자살을 질병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사회적 시선이 두려워 치료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원주의대 정신건강의학과 민성호 교수도 “‘F코드’를 색안경 끼고 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보험상의 불이익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가 자살 시도 이후 실손의료보험을 적용받으려 해도 보험업감독업무시행세칙에 따라 F코드에 해당하는 경우 지불한 의료비는 보상 받을 수 없다. 자살 시도는 질병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외래나 입원치료를 받았을 경우 보험 가입 시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 보험 등 관련이 없는 보험에 대해서도 ‘F코드’ 진료기록이 있는 환자가 가입 거부를 당한 경우도 있다.
일산백병원 박은진 교수는 “한 번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제때 정신의학과 진료를 받지 않으면 또다시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은 ‘자살 고위험군’”이라며 “정신의학과 진료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보험업계 등의 어긋난 관행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