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혁상] ‘잊혀진 홀로코스트’

입력 2014-03-10 01:54

2007년 2월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부속건물인 레이번 빌딩 2172호에선 역사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하원 외교위원회가 처음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한 것이다.

당시 청문회장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한국인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와 네덜란드 출신의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 등 3명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수십년 전 10대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간 과정,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오헤른 할머니는 증언에서 위안부 문제를 ‘잊혀진 홀로코스트(forgotten holocaust)’라고 표현했다. 몇 년간 지옥과도 같았던 경험을 때론 절규하고 때론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이들의 목소리에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분개했다. 이 청문회는 결국 그해 7월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그 전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에서만 조명을 받았다. 미국 등 서양 국가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3년 오헤른 할머니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자신도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린 뒤부터였다. 미 의회 청문회가 열린 것도 이런 영향이 컸다.

사실 오헤른 할머니가 처음부터 이를 공개적으로 밝혔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50년 넘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용기를 낸 것은 1992년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뉴스를 통해 접하고 난 뒤였다. 한국인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듬해 8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河野)담화의 기반이 됐다. 참혹한 경험을 다시 떠올려야 했던 한국인 할머니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으로도 큰 이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강도 높게 제기하면서 오헤른 할머니의 ‘잊혀진 홀로코스트’란 표현을 인용했다. 일본 정부를 직접 겨냥해 전례 없이 강경한 입장을 밝히면서 나온 말이다. 윤 장관의 이번 연설은 실로 오랜만에 국제무대에서 들려온 속 시원한 소식이다. 그런데 구태여 사족을 덧붙이자면, 위안부 문제는 결코 ‘잊혀진 홀로코스트’가 아니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국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현재 진행형 사건이다. 최소한 일본 총리가 눈물로 참회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기 전까진 말이다.

남혁상 차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