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3) 결혼 한달 만에 美서 이혼녀로 “하나님, 왜 저를…”
입력 2014-03-10 01:51
1985년 뉴욕에 도착했지만 내 결혼생활은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나는 결혼한 여자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악몽을 겪어야만 했다.
그의 집안이 소유했다는 30채의 아파트는 거짓말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처음 이민 온 한국인들에게 안내를 해 주는 대가로 보험을 파는 보험사였다. 남편은 흑인 동네의 가게에서 가끔 일을 하면서 용돈을 벌었고 적당한 직업도 없었다. 남편의 집안에서 부모님이 주신 결혼지참금 1만 달러, 결혼식 예물, 결혼반지마저 보관해준다고 해서 모두 주었다. 가진 모든 것을 남편 집안에 주었을 때부터 그는 나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처음 당하는 학대가 두려워 방에서 문을 잠그고 숨거나 그의 학대를 피하려다 아는 사람도 없는 거리에서 손에 피를 흘리며 헤맸던 적도 있었다.
3주 후에 부모님이 뉴욕을 방문하셨다. 남편은 나에게 자신이 학대한 사실을 말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자신이 사업체를 시작하기 위한 돈도 부모님께 요청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미국에 올 때 아버지가 주셨던 결혼 지참금을 벌써 그에게 다 주었다. 더 이상 아버지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날 키워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효도를 할 차례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고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 내린 부모님 얼굴을 보았을 때 나오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공항에 내린 부모님의 얼굴이 너무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분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1주일 후 부모님이 떠나실 때 나는 비상금 300달러를 아버지께 돌려 드렸다. 내가 비상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개를 스스로 잘라 버렸다. 이는 내가 그곳에서 죽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더 이상 나의 집안에서 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나를 공항으로 데려가서 LA 비행기표를 사 주고 떠나 버렸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내가 다시 뉴욕으로 오면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LA 공항에 내린 나는 언니의 품에 안기어 한없이 울었다. 부잣집 막내딸이 결혼 한 달 만에 처치곤란의 골칫덩이 이혼녀가 된 순간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북한 사역을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립보서 1:12)
그러나 성매매로 팔렸던 탈북민 여성들을 만나면서 이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이다. 토요일마다 마포역 사무실에서 탈북민 여성을 양육하는 유티학교를 하고 있다.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중국 땅에서 성매매로 팔려서 원치 않는 가정을 꾸미고 아이도 낳아 살던 탈북민 여성들에게 나는 내가 당한 일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아마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당한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의 마음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내가 당한 일을 북한 여성들을 위해 사용하고 계신다. 그러니 내가 당한 일로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