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의 미디어비평] 대하사극 KBS의 정도전, 난세 지략이 담긴 新삼국지

입력 2014-03-08 10:01 수정 2014-03-08 12:16

[쿠키 미디어비평] ‘정통사극’이자 ‘대하드라마’ KBS 1TV의 ‘정도전’이 600년을 거슬러 가는 난세의 영웅담으로 매주말 남성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SBS와 MBC 등이 가장 치열하게 맞붙는 주말 드라마시장에서 ‘정도전’은 18회분이 방송된 지난 3월 2일 14.6%의 시청률(이하 닐슨코리아 기준)을 기록했다. 토요일과 달리 일요일은 방송3사가 드라마 외에도 KBS2의 ‘개그콘서트’까지 가세해 시청률을 분점하는 탓에 ‘정도전’은 어느 정도 시청률 기반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드라마가 대박나는 문법은 전형화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첫회 시청률 7~10% 이상으로 산뜻하게 출발해서 3~4회 안에 입소문을 내고 ‘리모콘 권력’을 쥔 30~40대 여성시청자를 강하게 끌어당겨 놓으면 남성들이 그 뒤를 따라오는 이른바 ‘대박의 사이클’이다.

그런데 대하사극 ‘정도전’은 그런 사이클만도 아닌 듯하다. 꾸준히 오르는 14.6%란 시청률은 아직 남성시청자들만이 끌어올린 기록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50부작 이상 대하사극에서 18회 차 방송은 기승전결 중 ‘승’의 단계로 막 접어들어 가고 있는 단계이다. 앞으로 고려의 멸망과 이성계의 모반과 위화도 회군, 조선왕조 건국으로 이어지는 만큼 방송횟수를 거듭할수록 시청률이 폭발할 내연성은 충분히 있다.

정통사극 ‘정도전’을 남성들이 왜 주목하는 것일까. 야사(野史)가 아닌 정사(正史)를 다룬 역사드라마는 원래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정도전’은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 남성들에게 더 어필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탄탄한 드라마 구성과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대업(大業)이란 명제 뒤편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권력암투와 권모술수의 디테일이 매회 남성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절대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두뇌싸움은 한마디로 ‘삼국지’와 다름없다. 더구나 2014년 한국의 정치에 무한염증을 느끼는 남성시청자들에게 ‘삼봉 정도전’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공유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주인공 정도전(조재현 분)과 이인임(박용규 분), 최 영(서인석 분)의 돋보이는 연기에다 촌철살인의 명대사들은 남성들의 가슴에 강한 메시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고려말 영웅 캐릭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존지략을 주기라도 하려는 듯 말 한마디마다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제작진 말대로 정도전은 ‘고려가 버린 아웃사이더’ 내지 ‘세상에 가장 낮은 곳에서 혁명가로 다시 태어난 사나이’라는 설정이 반어(反語)적 여운을 남긴다.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백성’의 아픔을 공유하고 비록 세상 경험은 짧지만 ‘나라를 바로세운다’는 정도전의 가슴엔 대업을 향한 정의와 열정만이 가득하다. 정도전이란 캐릭터는 ‘백성을 중시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으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정적의 칼에 단죄되었다가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伸寃)되는 극단적 삶을 산 인물’이다.

이에 반해 절대권력을 둘러싸고 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재상, 권력만을 좇는 노회한 권문세가 정치9단의 이인임이 던지는 명대사 하나 하나는 남성들의 폐부를 찌르는 新‘삼국지’ 명언들로 남는다.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 ‘전장에서 칼은 적을 찌르지만, 조정에서 칼은 칼집이 아닌 웃음 속에 감추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공이 박영규라는 이야기마저 나올정도로 카리스마와 지략이 넘친다.

6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려말과 오늘 상황을 연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 역시 지금의 시대 상황에서 드라마를 자꾸 반추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는 ‘600년 전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려 한 위대한 정치가’가 정도전이라면 과연 2014년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진짜 정치가‘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시청자들에게 안겨준다.

드라마 ‘정도전’은 KBS가 공을 무척 들여 제작하는 정통 역사드라마다. 왕조 권력 뒤편이 아닌 정사로써 승부를 걸겠다는 의도 역시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드라마 정도전은 또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바로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하 역사드라마를 KBS가 잇따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대하 역사드라마는 모든 방송사에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편당 평균 3억~3억5000만원을 잡는다면 토·일 이틀간 6억~7억원이란 막대한 제작비용이 들어간다. 같은 사극이라도 정사로 승부를 걸 경우 세트제작비 등 비용이 더 치솟는다. 그래서 대하사극은 시청료를 받는 공영방송 KBS만이 할 수 있는 장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들이 나올 수 밖에 없다.

KBS는 대하 사극드라마를 꾸준히 제작해왔지만 2000년 초부터 긴축재정으로 인해 지난 2009년 ‘천추태후’가 나오기 까지 무려 6년간 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KBS는 대하 역사드라마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노하우와 경쟁력을 갖고 있다. 실례로 지난 1998년 ‘용의 눈물’은 49.6%, 2001년 ‘태조 왕건’은 무려 60.2%라는 대하사극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KBS는 4년전 ‘삼국시대 영웅 군주’ 3부작을 제작키로 했었다. 1탄인 백제 ‘근초고왕’은 지난 2010년 11월 방송됐다. 이는 50부작 이상의 KBS 대하 역사드라마의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어 92부작인 고구려의 ‘광개토태왕’(2011~2012),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을 다룬 ‘대왕의 꿈’(2013)이었다. 이런 점에서 드라마 ‘정도전’이 제작됐다. ‘정도전’은 KBS가 백제와 고구려, 신라 등 삼국영웅 3부작에 이어 앞으로 정통 사극 드라마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상징적인 드라마나 다름없다.

정통 대하사극 KBS1의 정도전이 과연 타사의 로맨스나 멜로 드라마들과 겨루어 어떤 승부를 낼 것인가. 지금까지 엇비슷한 시청률을 보여왔던 SBS의 ‘세번 결혼하는 여자’(최고시청률 16.1%)와 MBC의 ‘황금무지개’(15.3%)와 맞붙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방송가의 주요 관심사다. 나아가 일요일 밤 자매 프로그램인 KBS2의 ‘개그콘서트’(최고시청률 15.3%)의 시청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역시 재미난 주말 관전 포인트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경호 논설위원 겸 방송문화비평가 kyung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