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제가 확인해 봤는데, 사실은 이렇습니다.” “확인해 봤는데? 봤는데? 왜 ‘봤는데요’라고 안 해? 어디서 고객님께 반말 짓거리야!” K증권사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A씨는 진지하게 재취업을 고려하고 있다. 온갖 트집을 잡으며 콜센터 책임자, 임원, 사장까지 전화를 바꿔 달라며 소란을 피우는 한 악성 민원인 때문이다. 증시가 하락세인 책임을 콜센터에 돌리는 사람이었다. 민원인보다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없다는 지침 탓에 겨우 전화를 끊고 옆자리 동료의 컴퓨터 모니터를 보니,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나보다 더 힘들다”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자본시장이 지독한 불황을 겪은 올해에는 증권사 콜센터와 영업소에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이 늘었다. 일부러 업무 마감시각에 전화를 해서 말투와 억양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 전화 응대가 오래 걸려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스스로 ‘손님이 왕’이라고 강조한다. “금융감독원에 불친절 민원을 넣겠다”고 횡포를 부리는 왕에게, 증권사들은 영업용 사은품을 쥐어주며 돌려보내고 있다.
천민자본주의
이른바 ‘진상 손님’인 블랙컨슈머에 시달리는 건 비단 증권사 직원들뿐만 아니다. 백화점 판매원들은 “입던 옷을 가져와서 바꿔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많은 직원들은 설득을 하다가 안 되면 손해를 감수하고 블랙컨슈머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옷을 던지고, 어깨를 밀치는 경우도 있었죠. 판매직 눈에는 그 직원 잘못이 아니라는 상황이 뻔한데, 어쨌든 사과를 해야 해요. 안 되면 매장 측에서도 ‘그냥 해드려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블랙컨슈머의 자신감은 ‘가진 자의 횡포’로 대변되는 천민자본주의의 단면이다. 돈만 지불하면 무슨 요구든 할 수 있다는 인식은 ‘라면 상무’와 ‘빵 회장’, ‘신문지 회장’을 낳았다. 이 인식이 조금만 더 발전하면 ‘맷값’을 지불하고 구타 범죄를 저지른 한 재벌가 2세의 이야기도 충격적이지 않게 된다.
블랙컨슈머와 감정노동을 만든 주체는 누가 뭐래도 기업들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한인임 연구원은 7일 “회사는 고객의 감동을 위해 노동자들을 반인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스터리쇼퍼(가짜 고객)나 미스터리페이션트(가짜 환자)를 보내 노동자에게 궂은 행동을 하고, 해당 반응을 살펴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경영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대형마트 경영진이 블루칼라 판매원들을 달달 볶는 장면이 생생하게 표현된 네이버 웹툰 ‘송곳’은 지난달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감정노동의 자리
천민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남몰래 눈물짓는 건 콜센터와 영업현장의 ‘감정노동자’다.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항상 웃는 모습으로 고객을 응대해야 하기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노동계는 이들을 한국사회에 뿌리 깊은 배금주의와 갑을관계의 희생양이라고 부른다. ‘라면 상무’에게 혼난 스튜어디스, “차량을 빼 달라”고 요구했다가 ‘빵 회장’에게 얻어맞은 호텔 지배인, 늦은 탑승을 제지하다 ‘신문지 회장’에게 얻어맞은 항공사 용역직원이 모두 감정노동자다.
이들은 말 못할 고충 속에서 노동하고, 그걸 속으로만 삭이다가 건강에 탈이 난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콜센터 노동자의 90% 정도가 고객으로부터 인격 무시, 욕설, 성희롱 등 부정적 사건을 경험했다. 모든 콜센터 노동자는 이러한 일을 일주일에 평균 1.4회꼴로 겪지만, 절반 정도의 노동자는 부정적 사건이 발생해도 규칙상 오히려 고객에게 사과를 해야 하거나 최소한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이들 가운데 25%는 우울증 증상이 의심됐고, 사회심리적 건강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비중은 40%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열악한 근무조건과 습관적인 자기기만 속에서 감정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에도 노출된다. 연세대 김인아 보건대학원 교수는 최근 감정노동자들이 일반인보다 더 자주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충격을 던져줬다. 분석 결과 ‘감정을 숨기고 일함’이라는 항목에 ‘매우 그렇다’고 답한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에 비해 우울감을 느낀 확률이 컸다.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한 비율도 감정노동자들이 남자는 3.7배, 여자는 2.9배 높았고,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남녀 각각 2.3배, 3.5배 더 많았다.
진상 짓도 적당히
기세등등한 블랙컨슈머들도 도가 지나치면 패가망신한다. 자신이 왕이라는 잘못된 믿음 속에서 기업을 공갈 협박하다가 공론장에 나오면 왕에게도 적용되는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법원이 공개한 판례들에는 이런 블랙컨슈머의 스토리가 가득하다.
2010년 2년 약정으로 구입한 휴대전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가열해 불태운 뒤 충전 중에 폭발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한 남성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제품 하자를 조작해 보상금을 받기로 마음먹은 그는 한국소비자연맹에 “어젯밤 10시에 휴대전화를 충전시켜둔 상태로 잠을 잔 뒤 일어나 오늘 새벽 운동을 갔다가 5시 반에 돌아와 보니 터져 있었다. 휴대전화는 완전히 망가졌고, 책상까지 그을렸다”고 신고했다. 언론사들에 조작한 사진을 보내는가 하면 “휴대전화 제조사가 사건 무마를 위해 합의를 강요했다”고 거짓말하기도 했다.
2012년 춘천지법은 맥주 회사를 공갈 협박한 한 40대 회사원 남성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그는 맥주 회사의 소비자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1병은 유리가루가 들어 있고, 1병은 맛이 이상하다”고 공갈 협박했다. 이 남성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운영하는 식품안전소비자신고센터에 거짓 민원을 넣는가 하면 맥주 회사의 소비자보호팀에는 “병맥주 유리가루 2억원, 혼탁에 대해 1억원 등 3억원에 깨끗하게 정리하자”고 말했다.
벌금과 요금의 모호함을 제시해 ‘정의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이끌어냈던 미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최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시장 사회가 도덕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한 콜센터 여직원은 “손님은 왕이다. 단, 어디까지나 돈으로 된 왕이다. 왕답지 않은 왕은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자격 잃은 왕 ‘블랙컨슈머’] “물어내” 진상 짓에도 미소 응대… 직원들 인권은 누가 물어내나
입력 2014-03-08 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