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빈곤정책] “신청에서 확정까지 꼬박 1년”… 이미경씨의 미성년 두 조카 기초생활수급 신청기
입력 2014-03-07 02:32 수정 2014-03-07 09:37
이미경(가명·56)씨는 주민센터 문을 밀고 들어가 처음 “도와 달라”고 말한 그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수수해 보이기 위해 골라 입은 노란색 셔츠와 청바지, “연구해 보겠습니다”라던 담당자의 답변, 흘끔거리는 주위 공무원들의 시선. 하나도 잊히지가 않는다. 곧 연락하겠다던 담당자는 소식이 없었다. 그 뒤 이씨가 미성년 조카 둘에게 기초생활수급권을 찾아주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2000년 미혼의 이씨는 생후 5개월과 세 살 된 두 조카를 얼떨결에 맡게 됐다. 남동생 부부가 사업 실패로 사채업자를 피해 잠적한 뒤였다. 제법 잘 나가는 과외교사였던 이씨는 “돈을 버니 애 둘쯤 감당하지 못할까” 자신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수입 대부분은 보모 비용으로 사라졌고 울어대는 조카들 틈에서 과외 일마저 줄어들었다. 아빠라도 찾아주자는 마음에 남동생의 빚 일부를 갚아준 것은 결정적이었다. 이씨는 아이 둘과 함께 빈털터리가 됐다.
“정말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더군요. 그러다가 부모와 헤어진 조카들은 수급권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들 일이니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찾아간 거였어요. 기초생활수급을 받겠다고 주민센터를 찾아갈 때 어떤 마음인지, 그걸 사람들은 정말 몰라요.”
2003년 봄 처음 만난 담당자는 6개월간 전화 한 통 없었다. 용기를 내 다시 찾아가 봤다. 담당자는 바뀐 뒤였다. 새 담당자는 “이게 무슨 얘기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처음부터 다시 얘기했다. 컴퓨터를 두드려본 그가 말했다. “애들한테 큰아빠도 있고 할머니도 있네요. 고모도 있고. 고모가 애들 돌보실 수 있잖아요.” 이씨 귀에는 ‘안 될 걸 왜 귀찮게 하느냐’는 말로 들렸다. 큰아빠는 부양의무자가 아니지 않나요?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는 척하다 미운털 박힐까 무서웠다.
몇 개월 뒤 대출금 연체로 이씨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다시 한 번 주민센터를 찾았다. “나까지 신용불량자가 됐으니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춰졌구나 생각했어요(웃음). 근데 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화가 났어요.”
그때부터 이씨는 공무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권리 운운하는’ 민원인이 됐다. 왜 안 되는지, 근거가 뭔지 따졌고, 안 먹힐 때는 “보건복지부에 민원 넣겠다”고 고함도 쳤다. 그 뒤 일은 일사천리로 풀렸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2004년 봄 이씨의 두 조카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됐다. 첫 상담 후 1년이 지난 뒤였다. 그 후 아이들 명의의 통장에는 매달 꼬박꼬박 생계·주거급여 80만원이 찍힌다.
현재 이씨는 두 조카의 ‘친인척 위탁모’(돌봐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조부모 등이 대신 양육하는 제도)로 지정돼 월 24만원을 받는다. 큰돈은 아니지만 제법 도움이 된다고 했다. LH공사의 전세자금 지원을 받아 잠시 월세 신세를 벗은 적도 있다. 주민센터 담당자가 알려줬어야 할 정보를 이씨는 신문 칼럼을 읽고 알게 됐다고 했다.
“전세자금 지원을 받게 됐다고 하니까 담당자가 되레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더군요. 본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LH공사에 신청한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에요.”
지난해에는 “부양의무자인 친엄마의 소득이 잡혀 급여를 깎아야 한다”는 전화가 걸려와 가슴이 내려앉은 일도 있었다. 둘째 조카가 5개월 됐을 때 연락이 끊긴 뒤 한 차례도 찾지 않았던 엄마였다. 다행히 소명서 쓰고 해결되긴 했지만 매번 같은 걸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지치게 했다.
6일 만난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해진 것도 우리 탓이고 그걸 헤쳐 나가는 것도 우리 몫이라고 생각해요. 사회 탓하는 거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 너무 힘들 때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만든 게 기초생활수급권이잖아요. 근데 세상에서 제일 굴욕적인 권리 같아요.”
글·사진=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