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1부) 자살 바이러스의 백신을 찾아라] 4. 마음의 응급실이 필요하다
입력 2014-03-07 02:32
“많이 힘드셨겠군요, 그래도 잘 견디셨습니다”
“비키세요! 지나갑시다!”
지난해 11월 어느 날 오후 11시쯤 서울 노원구 상계백병원 응급실. 신종플루 고열 환자, 팔이 부러진 아이, 의식을 잃고 실려 온 노인 사이로 구급대원들이 고함을 치며 응급환자용 이동침대를 밀고 내달렸다.
의료진이 황급히 달려와 이동침대에 누워 있는 A씨(55)의 상태를 살폈다. 맥박과 호흡을 재고 세차게 흔들며 불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는 주거지인 쪽방촌 방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 발견 당시 머리맡에는 생수 한 병과 알약 포장지 여러 장이 놓여 있었다.
A씨가 의식을 회복한 건 2시간 뒤인 이튿날 오전 1시였다. 응급실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취객, 중태에 빠진 환자 옆에서 오열하는 가족들로 소란스러웠다. 상처가 비교적 가벼운 어떤 환자는 “3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왜 아무도 안 오느냐”며 역정을 냈다. A씨는 침대에 누워 응급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아픈 이들의 응급실
정부는 2011년부터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 사업’을 시범적으로 시행해 왔다. 응급실에 자살 시도자가 실려 오면 정신의학과 진료 및 사회복지 서비스와 연계해 장기간 돌봐준다. 자살 재시도를 막기 위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마음까지 치료하는 일종의 ‘마음의 응급실’이다. 다행히 상계백병원은 이 사후관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지 30여분 만에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A씨에게 다가왔다. 그 여성은 차분한 음성으로 왜 자살을 시도했는지, 전에도 그런 적이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A씨는 천천히 대답했다.
5년 전만 해도 음식점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친구 보증을 섰다가 거액의 빚을 떠안았다. 가게를 빼앗길 위기에 놓여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했는데 이미 잠적한 뒤였다. 거듭되는 부부싸움 끝에 이혼했다. 가족과 재산을 잃고 쪽방촌에 방을 얻어 매일 술로 지새다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다. 5개월 전 처음 자살을 시도했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A씨가 응급처치를 받고 이대로 돌아가면 조만간 다시 실려 올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런 환자를 ‘마음 응급실’은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먼저 병원 정신의학과 의료진이 환자의 정신건강을 확인한다. 이어 전담 상담사(이곳에선 ‘사례관리자’라고 부른다)가 지정돼 환자와 계속 대화를 나누며 심리 상담 및 치료의 필요성을 설득한다. 상담사는 사회복지사 1급이나 정신보건 2급 이상 자격증이 있는 정신보건전문요원이다. 병원이나 지방자치단체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소속돼 활동한다.
환자의 증상이 개선되면 정신건강증진센터를 통해 환자에게 필요한 지자체 복지서비스를 찾아주며 사후 관리를 하게 된다. 자살 재시도율이 높은 고위험군(群)을 집중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서울 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 홍기정 교수는 “자살 시도자가 마음을 가장 잘 여는 시간은 응급실에 실려 온 딱 그 순간”이라며 “응급실은 자살을 치료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장소”라고 말했다.
A씨를 담당한 의료진은 그를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도록 권유했다. 충분한 대화를 나눈 뒤 귀가한 A씨는 노원구 정신건강증진센터를 통해 지속적인 상담을 받았다. 처음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찾아오는 상담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사는 늘 그에게 “그러셨어요? 힘드셨겠군요. 그래도 잘 견디셨습니다”라고 얘기해줬다. 시간이 갈수록 한 주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재미가 붙어 그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2개월 후 A씨는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구청 일자리 지원센터를 방문해 시간제 일자리를 구했다. 일을 시작한 뒤로는 2주에 한 번씩 상담이 이뤄졌다. A씨는 6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제 자살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더 나은 직업을 구하려고 직업교육 기관에 다니고 있다.
서울 관악구와 강원 원주시의 변화
2011년 서울 자치구 가운데 가장 자살자가 많은 곳은 관악구였다. 연간 17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장 적었던 중구(39명)의 4배가 넘었다. 이에 관악구는 보라매병원과 협약을 맺고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 사업을 도입했다.
이후 관악구 정신건강증진센터 상담사들은 아예 오전 9시부터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출근했다. 통상 자살 시도자들이 밤늦게 응급실에 실려와 치료받은 뒤 아침에 귀가하는 것을 감안한 조치였다. 이들은 자살 시도자가 아침에 기운을 차리면 상담을 진행해 치료 프로그램에 등록토록 설득했다.
홍 교수는 “응급실까지 실려 온 이들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라며 “아수라장인 응급실에서 이들과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두 시간 상담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면 자살 시도자들이 대체로 큰 거부감 없이 치료 프로그램에 동의하곤 했다”고 말했다.
성과는 곧 나타났다. 2012년 관악구 자살자는 127명으로 줄었다. 2011년 33명이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도 2012년 24.6명으로 급감했다. 2012년 26.6%였던 자살 시도자의 치료 프로그램 동의율은 지난해 69.2%까지 뛰었다.
강원도 원주시는 2009년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먼저 원주세브란스병원 등과 함께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강원도는 전국 시·도 중 자살률 1·2위를 다투던 곳이다.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살 예방 홍보도, 우울증 대책도 검토했다. 그러나 이는 인식을 바꾸는 작업이라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든다. 빠른 효과가 필요했던 원주시는 자살 재시도율을 낮추는 데 집중키로 하고 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이후 5년간 원주시에서 자살 시도자 1152명이 사후관리 프로그램을 거쳤다. 2009년 54%였던 치료 프로그램 동의율은 지난해 67%로 늘었다. 치료 동의율이 올라가면서 자살률은 떨어졌다. 2012년 원주시 자살 사망자는 전년보다 30% 감소한 99명이었다. 원주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민혁 교수는 “전체 자살 시도자 중 약 40%가 10년 내 자살을 재시도하고 그중 7%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며 “현재 원주시 자살 시도자의 약 60%가 사후관리 시스템을 통해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살예방센터를 운영 중인 서울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1년 26.9명이던 자살률이 2012년 23.8명으로 줄면서 6년 만에 자살자가 감소했다. 자살예방지킴이 제도, 자살예방 상담전화, 자살유족 심리안정 지원, 자살 시도자 위기관리 등을 계속 추진해온 결과다. 이런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 사업을 25개 대형 종합병원으로 확대했다.
조성은 전수민 기자 jse130801@kmib.co.l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