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제하 ‘건널목의 사슴’ 발표… “윤리적 의지 고수 않는다면 그건 뼈 없는 소설”
입력 2014-03-07 01:36
소설가 이제하(77)씨가 계간 ‘소설문학’ 2014년 봄호에 단편 ‘건널목의 사슴’을 발표해 화제다. ‘건널목의 사슴’은 그가 순수 문예지에는 15년 만에 발표한 작품으로, 장편소설 ‘일어나라, 삼손’을 올 1월부터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하려다가 문학 외적인 문제로 무산되는 파동을 겪은 후 그 상심을 딛고 쓴 작품이라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건널목의 사슴’은 중학교 때 자신이 받을 장학금을 더 가난한 친구에게 양보했던 주인공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대기업 임원으로 성공한 친구와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 마주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무슨 비명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 강아지가 앞서 달려간 길을 따라 올라갔던 나는 동네 중턱 부근에서 개가 마른 걸레짝처럼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건드려 보았으나 이빨자국도 상처 같은 것도 보이지 않은 채 개는 숨도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강아지 몇 걸음 곁에는 큰 개의 목줄을 잡은 그가 서 있었다. 그 개는 첫 눈에도 셰퍼드 같았다.”(‘건널목의 사슴’)
하필 수십 년 만에 만난 그 친구의 셰퍼드가 ‘나’의 강아지를 물어 죽인 것인데 그 친구가 대뜸 하는 말이 ‘나’의 속을 후벼 판다. “보상을 할게…얼마면 돼?” ‘나’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건네려는 친구의 턱을 주먹으로 가격하며 말한다. “네 개, 다시 안 보게 해줘. 딴 데로 보내든가.”
얼마 후 친구는 학창시절에 ‘나’가 장학금을 양보했던 일을 상기하면서 고가의 빌라를 공짜로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나’는 다 지나간 이야기이고 고급 빌라 따위는 필요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친구의 부음소식을 듣는다.
“그 뒤 달포도 더 지나 알게 된 그의 죽음도 이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실버단지를 방만하게 운영하려다 대빵에게 따귀를 맞았다든가 대빵 형제의 재산싸움에 끼어 이러저리 돈을 옮기다 궁지에 몰리자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는 세상의 풍문도 그러니 애오라지 믿을 게 못되는 것이다.”(‘건널목의 사슴’ 마지막 부분)
이제하씨는 계간 ‘소설문학’이 마련한 박정윤 작가와의 대담에서 이 소설의 모티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대의 윤리적 의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을 고수하려는 의지까지 없어지면 소설은 맥이 빠지고 생선 썩는 냄새를 풍겨요. 그건 뼈가 없는 소설이죠. 현실적으로는 장학금을 대신 받았던 중학교 때 친구가 그 인정과 은혜를 고가의 빌라로 갚으려들면 마지못한 듯이 당연히 받으려들겠죠. 타협하면 자본에 순응하는 게 되는데 그걸 거부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하는 의문이 이 소설의 모티프죠. 윤리적 의지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게 엄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당대의 뼈대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는 아울러 우리 시대의 선비 기질이란 시대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것이며 그것이 소설가의 의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선비기질 같은 것이 아직도 티끌만치나마 남아 있다면 (고가의 빌라를 받는) 그런 짓은 못하죠. 그것마저 없어졌다면 무엇 때문에 소설 같은 걸 써요. 이미 무너진 사회인데. 그리고 요즘은 전달이라는 문제에 더 신경이 가고 있어요. 뭘 어떻게 전달할 수가 있는가. 독자에게 던지고 싶은 화두도 그 범위 내의 것이지요. 장학금을 대신 받았다고 빌라를 주겠다는데 왜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하는 그 이유의 전달 문제이지요.”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