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시집-신달자 ‘살 흐르다’] ‘살아 흐르듯’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

입력 2014-03-07 01:35


“여명의 어둠이 아주 조금 엷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 저는 버릇처럼 창 앞에 섭니다. 그리고 새 아침을 바라봅니다. 그때마다 설렙니다. 어둠과 빛의 분량이 비슷한 그 순간의 어울림은 청색입니다. 거기 나의 안식이 있을 듯도 합니다.”(‘시인의 말’)

1964년 등단 이후 50년 동안 쉼 없이 시를 써온 신달자(71·사진)의 열세 번째 시집 ‘살 흐르다’(민음사)는 어둠이 빛을 깊이 끌어안는 여명의 순간에 건져 올린 밀도 높은 70편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거실에서는 소리의 입자들이 내리고 있다/ 살 흐르는 소리가 살 살 내리고 있다/ 30년 된 나무 의자도 모서리가 닳았다/ 300년 된 옛 책장은 온 몸이 으깨어져 있다/ 그 살들 한마디 말없이 사라져 갔다/ (중략)/ 멀리 갔는가/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가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을 것”(‘살 흐르다’ 부분)

몸을 갖고 있었으나 어느 새 슬그머니 사라지는 몸들. 시인은 그것을 어디선가 들려오는 살 흐르는 소리라고 표현한다. 어떤 보이지 않은 손이 살들을 조금씩 실어 나르는 동안 우리는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이 어느 흰빛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사라지는 세계의 비밀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투시력을 지닌 시인의 마음은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풀려나 적막하다. 사라지는 세계란 바꿔 말하면 쥐고 있다가 놓아버린 세계이다.

“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 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구나/(중략)/ 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 그다음의 고요를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내 앞에 비 내리고’ 부분)

시인은 눈앞에서 내리는 비뿐만 아니라 미뤄 둔 빨랫감이나 돌리다만 청소기 혹은 분리수거를 기다리는 낡은 상자에게서도 시를 끄집어낸다. 하지만 그의 시는 봄날에 꺼내어 입는 청색 점퍼처럼 안온하면서도 늘 젊은 것이 특징이다. “전설의 연애 하나/ 마음속에서 굴러 나와 장롱 밑을 어슬렁거리다/ 어느 마음을 더듬어 가려고/ 있다……없다……/없다……있다// 기온은 더 하강하고/ 걸음 멈추고 빈방의 온도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시간/ 그 작고 단단한 연애 하나를/ 다시 외투 주머니에 푹 쑤셔 넣는다”(‘있다 없다 전설 같은 연애 하나’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