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폴리 현숙 (2) 내 인생의 첫번째 실수 ‘하나님을 외면한 결혼’
입력 2014-03-07 01:31
나의 삶에 있어서 ‘부르심(소명)’은 결혼을 잘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시절 선교를 하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집안에는 목회자가 없었고, 서원기도를 한번 했지만 그것이 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기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의 삶은 그것과 상관없이 흘러갔다. 지금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1980년대 대부분의 대졸 여성들의 목표가 나와 비슷했다. ‘커리어 우먼’이라는 단어조차 아예 없는 시기였다. 대학졸업장은 단지 결혼을 하는데 필요한 자격증에 불과했었다.
부모님은 1970년대부터 미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딸들을 재미교포와 결혼시키려는 생각을 하셨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여성에게 많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남편과 아내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례로 미국에서는 부부가 집을 구매하게 되면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동등하게 올렸다.
6명의 언니들 중 한 명은 항상 부모님의 골머리를 썩였다. 어려서부터 화려한 남성편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원치 않는 남자를 만나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아버지가 원하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그것을 말씀드렸고 배우자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 먼저 여쭤보고 확인 절차를 밟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순서를 밟은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 첫 중매로 만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것은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결정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라 내가 주체였고 하나님은 나의 결정을 돕는 도우미였다. 십계명 중 “하나님 이외의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는 첫 번째 십계명을 어겼다. 하나님 대신 내 안에 있는 ‘나’ ‘나의 결정’ ‘나의 생각’을 섬기는 큰 죄를 범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85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중매쟁이를 통해 미국에 이민 간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는 뉴욕에 30개의 아파트를 갖고 있는 재력가 집안이라고 했다. 처음 몇 개월간 우리는 편지로만 서로를 알아가다 그가 한국을 방문함과 동시에 급하게 약혼식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먼저 미국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결성을 보여줌으로써 남편에게 평생 보상받을 줄 알았다. 남들처럼 연애도 하지 않고 남편을 평생 기다렸다는 증명을 하고 싶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던 나는 보기와 달리 집, 학교, 교회밖에 몰랐다.
홀로 미국으로 가는 준비를 하는 중에 하루는 그 사람의 형님 댁을 방문했었다. 그때 그 사람의 형님이 자신의 아이들과 내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결혼지참금 1만 달러 외에 300달러의 비상금을 주셨다. 그리고 이 비상금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언니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 값이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말씀하셨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효도를 못 했는데, 이제 아버지가 원하는 결혼을 해서 떵떵거리고 잘사는 딸이 되어 효도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가장 안전하고 보장된 모험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대학생 때 하나님께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기도한 것은 까마득하게 잊은 채로.
정리=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