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란 이름의 질병-(1부) 자살 바이러스의 백신을 찾아라] 3.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입력 2014-03-06 01:37
병들고 늙은 아버지는 쓸쓸하게 ‘마지막 선택’을 했다
지난해 6월 김한영(가명·76)씨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아내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이다. 수술은 잘됐다. 그냥 혼자 지내고 싶었는데 아들은 “우리 집에 와 계시라”고 고집했다. 맞벌이하는 며느리가 아침저녁 열심히 상을 차렸다. 싫은 내색도 별로 없었다. 다만 밥상머리에서 아들 내외와 일곱 살 손녀는 묵묵히 수저만 움직였다. 꼬장꼬장하던 김씨가 한껏 부드럽게 “아범은 요즘 고되지 않냐” “아가, 유치원은 재미있니” 말을 붙여도 대화는 길게 이어지는 법이 없었다.
권위 있는 아버지
그래도 밥 먹을 때가 나았다.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손녀가 유치원에 가면 텅 빈 아파트에 혼자 남았다. 1주일에 한 번 병원 가는 날만 바깥 공기를 쐬었다. 그 밖에는 통증을 잊기 위해 억지로 자다 깨는 게 전부였다. 점심은 거르는 날이 더 많았다. 커다란 식탁에 홀로 밥을 차리는 게 처량해서다.
그에게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1977년 전기 기술자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돈을 벌어 자식 셋을 대학에 보냈다. 젊음을 바쳐 부족함 없이 키운 자식들에게 늘 당당했다. ‘권위 있는 아버지’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식들이 용돈을 건네면 “그 돈 없어도 거뜬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처량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아내에게 당뇨 합병증이 찾아온 2009년부터다. 벌어둔 돈은 병원비로 금방 빠져나갔다. 자식들이 주는 용돈에 의지하다 보니 생활이 점점 궁핍해졌다. 자존심에 차마 ‘돈 좀 더 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간간이 공공근로에 나가 생활비를 보탰다. 이듬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어쩔 줄 몰랐지만 그래도 자식들 앞에선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빈자리
아내가 없는 집에 시간이 갈수록 자식들 발길도 뜸해졌다. 주말마다 돌아가며 들르던 자식들은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비추더니 아내의 첫 기일이 지나자 명절에도 만나기 힘들어졌다. 딸들이 “노인정에라도 나가 보라” 했지만 김씨는 “청승맞다”며 고집을 피웠다. 암 진단을 받은 뒤론 생각이 복잡해졌다. ‘죽으면 아프지도, 외롭지도, 자식들이 번거롭지도 않겠지….’ 아들집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틈틈이 유서를 썼다.
지난해 9월 석 달 만에 아들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던 날, 김씨는 점퍼도 벗지 않고 불 꺼진 거실에 주저앉았다. 창 밖에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이날로 삶의 적적함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유서를 꺼내 마지막으로 훑어보고 다시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안방이 보였다. 이부자리에 누워 손짓하던 아내의 앙상한 팔목이 눈에 선하다. 안방에 들어가 낡은 옷장을 열었다. 큰딸 결혼식 때 매려고 백화점까지 가서 장만했던 파란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넥타이를 안방 문고리에 걸고 매듭을 만드는 손이 떨렸다. ‘여보.’ 아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름이 무성한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살 실패에 절망한 노인
그날 오후 8시쯤 김씨는 서울 노원구 상계백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김씨가 돌아온 걸 본 아파트 경비원이 그동안 받아둔 신문을 챙겨 올라간 덕이었다. 김씨는 안방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119 대원은 “3분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자녀들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응급실 인턴이 ‘자살 시도자 사후 관리 프로그램’ 동의서를 들고 보호자를 찾았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큰딸은 “선생님이 잘못 아셨는데, 우린 이런 것 필요 없다. 우리 아버지는 정신 말짱하고 강인한 분”이라며 오열했다. 자식들은 ‘당당한’ 아버지의 서글픈 내면을 처음 마주했다.
의료진이 자식들을 설득해 동의서를 받아낸 건 자정이 다 돼서다. 응급실 인턴이 인적사항부터 자살 시도 상황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당직이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의식을 되찾은 김씨를 보러 왔지만 그는 눈물만 흘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의료진은 당분간 입원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교수가 다시 병실을 찾았다. 우울증 진단이 나왔다. 경제적 어려움, 신체 질환, 대인관계 등에서 비롯되는 노인의 전형적인 불안과 우울이었다. 오랜 시간 삶에 회의를 느껴온 김씨는 죽음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유서도 미리 준비했고 위험한 수단을 택했다. 무엇보다 ‘실패한 자살’에 크게 절망하고 있었다. 의료진은 ‘체계적 자살 위험평가’에 따라 김씨 상태를 가장 위험한 단계인 ‘상(上)’으로 표기했다.
다시 생명을 얻으라
진단은 김씨 거주지인 노원구 정신건강증진센터 전모 자살예방팀장에게 전달됐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많이 힘드셨죠?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병실을 찾은 전 팀장이 인사를 건넸지만 김씨는 한번 힐끗 보곤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전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리적 어려움으로 응급실 방문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역사회 서비스가 있다”며 말을 이었다. 김씨가 “다른 데 알아보라”고 밀어냈지만 전 팀장은 그가 입원한 사흘 내내 병실을 찾아 왜 상담이 필요한지 거듭 설명했다. 반쯤은 귀찮아서, 또 반쯤은 기특해서 김씨는 마지막 날 상담에 동의했다.
전 팀장은 김씨가 퇴원 후 매주 한 번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진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동행했다. 중간에 치료를 중단하는 환자가 많아서다. 김씨가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무슨 치료를 받느냐”며 어깃장을 놓을 때도 전 팀장이 옆에 있었다. 진료 내용을 되짚어주고 처방된 약의 복용법과 부작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병원 가는 날이 아니어도 자주 집에 찾아가 낮잠은 얼마나 자는지, 식사는 잘하는지 챙겼다. 곁눈으로 약봉지가 제때 줄어들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김씨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전 팀장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젊은 사람한테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하다”거나 “폐 끼치기 싫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한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어놓던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얘기를 했던 게 10년 전”이라고 고백했다.
이제 전 팀장은 더 이상 외래진료에 동행하지 않는다. 대신 2주에 한 번씩 만나 상담을 한다. 전 팀장의 권유로 자녀들도 수시로 전화하고 주말마다 찾아간다. 김씨는 “전에는 죽을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살아보려 한다”며 “전 선생님처럼 나를 돕는 사람들 덕분에 살아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폐 끼치기 싫어” 노인자살률 OECD 1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10만명당 자살자 수)은 2000년 34.2명에서 2010년 80.3명으로 급증했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같은 기간 22.5명에서 20.9명으로 줄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노인 자살률은 노인 빈곤, 질병의 증가, 핵가족화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모두 우울증으로 이어지기 쉬운 요인들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0년 61세 이상 노인 494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중 2259명이 육체적 질병 문제로, 1361명이 정신과적 문제로 자살을 택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07∼2011년 보험진료비를 분석한 결과는 더 극명하다. 이 기간에 우울증 환자는 12.4% 증가했는데 80대 이상 환자는 81.9%, 70대 이상은 52.6%나 급격히 늘어났다.
노인의 자살 시도는 성공률이 높아 더 치명적이다. 자살 시도자는 200명 중 1명꼴로 사망하는데 노인은 20명 중 1명이 목숨을 잃는다. 몸이 약하고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아 발견도 어렵다. 박기창 횡성군정신건강증진센터장은 “노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자살을 감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청소년이 주로 ‘복수성’ 자살, 중년층이 ‘회피성’ 자살을 하는 데 비해 노인은 대부분 ‘이타적’ 자살을 한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내가 죽으면 다른 어려운 사람이 정부 지원을 받을 테니까’ 등의 이유가 많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 이구상 팀장은 “노인은 자살 재시도 의지가 강해 정신보건 서비스 거부율이 높은 편”이라며 “특히 80대 이상 남성은 자살률이 우리나라 평균의 7배나 되는 초고위험군이어서 철저한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