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울다 지쳐 빨갛게 멍이 들었나… 남도는 지금 동백꽃이 피고 지는 계절

입력 2014-03-06 01:32


낙화해야 더 처절하게 아름다운 꽃이 있다. 핏빛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뚝뚝 떨어져 땅에 뒹굴면서도 해맑게 웃는 동백꽃이 그 주인공이다. 추운 겨울날 눈 속에서 피기 시작한 동백꽃은 진달래와 개나리 등 봄꽃이 피기도 전에 빨갛게 멍이 든다. 그리고 떠난 임이 돌아올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섬처녀의 애끓는 마음처럼 남도의 산하를 붉게 채색한다.

동백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왔다. 청마 유치환은 동백꽃을 ‘목 놓아 울던 청춘의 피꽃’이라고 불렀다. 이생진 시인은 꽃 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을 보고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라고 부러워했다. 동백꽃을 ‘해를 닮은 웃음소리’로 표현한 이해인 수녀는 ‘네가 있어 겨울에도 춥지 않구나’라고 고마워했다.

원산지도 동양이고 이미지도 동양적이지만 서양에도 동백꽃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이 있다.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을 든 여인’에 나오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별명이 동백아가씨를 뜻하는 ‘춘희’였다. 이 소설을 소재로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가 각색한 오페라가 ‘라 트라비아타’이다.

하지만 동백꽃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작품은 문학작품도 아니고 오페라도 아닌 대중가요 ‘동백 아가씨’이다. 떠난 임을 기다리는 여인을 동백꽃으로 은유해 여인의 심사를 표현한 ‘동백 아가씨’는 국민가수 이미자가 부른 대히트 곡.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애절한 가사와 곡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한반도에서 동백꽃이 가장 먼저 피는 곳은 제주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동백섬으로 변신하는 제주도 최고의 동백나무 군락지는 남원읍 위미리. 제주도의 거센 비바람에 낙화한 동백꽃이 돌담길과 텃밭을 온통 붉게 채색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나 마찬가지다.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남원읍 신흥2리의 동백나무 군락지도 눈을 황홀하게 한다.

바다를 건너온 동백꽃은 부산 동백섬을 점묘화처럼 단장했다. 해안선을 따라 1㎞ 정도 이어지는 산책로 주변에 뿌리를 내린 동백나무는 2000여 그루. 누리마루 에이펙하우스와 바다 건너 광안대교가 동백섬의 매력을 더한다.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일몰을 배경으로 한 사하구 다대포 아미산전망대의 동백꽃은 외로움이 물씬 느껴진다. 가덕도 등대 가는 길에도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가덕도에서 해저터널로 유명한 거가대교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 거제도이다. 거제도의 학동흑진주몽돌해변에서 서쪽으로 1㎞ 구간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학동동백림. 푸른 바다를 캔버스 삼은 초록색 잎과 붉은색 꽃이 강렬한 색채미를 자랑한다. 거제해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우제봉도 동백나무 군락지로 유명하다.

거제도 동쪽 바다에 위치한 지심도는 원시림의 보고로 섬 면적의 60∼70%를 동백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아담한 선착장에서 섬 중턱 쉼터까지의 지그재그 오솔길은 동백나무 터널. 원시의 생명력이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오솔길에선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자마자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한려수도의 푸른 보석’으로 불리는 통영 장사도는 거제도 남단 근포에서 직선거리로 1㎞ 떨어진 길쭉한 섬으로 동백나무가 10만 그루나 자생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순간이동을 한 천송이(전지현 분)와 도민준(김수현 분)이 동백꽃 만발한 장사도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연일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한려수도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통영 수우도의 동백꽃도 장관이다. 삼천포에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수우도의 행정구역은 통영이지만 주민들의 생활권은 삼천포다. 수우도 동백나무는 모두 2만여 그루로 수령은 200∼500년. 섬 최고봉인 은박산(189m) 남쪽과 동쪽 사면에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나 접근이 어렵다. 통영 미륵도를 한바퀴 도는 산양관광도로의 동백나무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처럼 색채가 강렬하다.

전라도의 동백꽃은 최남단에 위치한 거문도부터 채색하기 시작했다. 거문도등대 가는 길에 위치한 동백나무 터널은 바다를 벗한 산책로로 연인들에게 인기. 육지와 방파제로 연결된 여수 오동도의 동백은 4000여 그루. 동백나무가 팔뚝 굵기로 자라는 데 100년의 세월이 걸린다는데, 이곳엔 한아름 굵기의 동백나무가 모래알처럼 흔하다. 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돌산도의 향일암 주변에도 동백나무 군락지가 경사지를 따라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강진의 만덕산 중턱에 위치한 백련사 앞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5.2㏊에 이른다. 수령 500∼800년이나 되는 동백나무 고목 8000여 그루가 밀림처럼 우거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동백꽃이 낙화하면 수많은 목숨들이 땅에서 아우성치는 듯하다. 떨어진 꽃이 주는 애틋함에 행여 밟을까 발을 내딛기가 저어될 정도. 강진읍내에 위치한 영랑 김윤식의 생가에는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의 소재가 되었던 동백나무 고목 다섯 그루가 대밭에 뿌리를 내린 채 바람이 불때마다 꽃멀미를 일으킨다.

완도는 세연정 등 고산 윤선도의 유적이 위치한 보길도를 비롯해 우리나라 최대의 난대림인 완도수목원에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장흥 천관산자연휴양림과 신안 흑산도, 목포 유달산, 해남 대흥사, 진도 첨찰산과 운림산방도 동백꽃이 아름다운 명소이다.

동백나무 숲은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에서 동백꽃이 반쯤 떨어져 풀밭을 시뻘겋게 물들일 때가 적기라고 했다. 이때쯤이면 동백나무 숲은 붉은색 물감을 쏟아 부은 듯 낙화한 동백꽃이 어둑어둑한 숲을 초롱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다.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