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獨 ‘통일외교 협의 채널’ 구축] 서독은 4대 전승국 반대 어떻게 극복했나
입력 2014-03-05 01:34
“統獨은 모두에 도움” 설파
소련엔 경제지원 ‘수표외교’
옛 서독은 주변국들의 반대를 외교의 힘으로 극복하고 통일을 이뤄냈다. 바로 동·서독 통일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독일식 통일 대박’ 논리를 앞세워 이를 돌파했다.
독일 통일은 우리나라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 4대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했다. 서독의 경우 1952년 서방 3개국(미국 영국 프랑스)과 독일 조약이 체결돼 3개국 군대의 주둔 권리를 인정했다. 조약에는 “서독에 대해 2차대전 전승 국가들이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해 독일 통일을 위해선 반드시 이들 3개국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동독도 소련군 영토 주둔권을 인정하는 등 소련의 동의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통일 열기가 무르익던 1980년대 후반 주변 강대국들은 한목소리로 독일 통일을 반대했다. 이미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한 만큼 바로 옆에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또 다시 생길 경우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득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조차 당시 상황에 대해 “주변국들의 반응이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서독은 이에 따라 4대 전승국 외교에서 ‘통일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부각시켜 통일 동의를 이끌어냈다. 먼저 미국의 경우 유럽 한복판에 친미·친서방 정책을 취하는 국가가 생긴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실제 서독은 미국에 ‘통일 독일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에 계속 잔류한다’는 약속을 하며 친미 정책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은 또 당시 유럽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점을 십분 활용했다. 독일 통일이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합을 앞당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독의 논리를 받아들여 유럽 통합을 위해 통일 반대를 철회했다. 이후 독일 통일은 1994년 유럽연합(EU) 발족 및 1999년 유로화 도입에 기여했다.
서독은 동독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소련에 대해선 소위 ‘수표 외교(Checkbook Diplomacy)’로 난국을 돌파했다. 통일 후에도 독일이 소련에 경제적 지원을 계속 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서독이 소련에 투자한 직간접적 지원은 무려 438억 달러(46조3000억원)나 됐다.
서독은 통일의 최종 절차였던 ‘2+4회담’에서도 외교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전승국들은 4개 전승국 회담에 2개 패전국(동·서독)이 참여하는 ‘4+2회담’을 바랐다. 4강 회의에 동·서독을 옵서버 형식으로 참여시켜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독은 독일 국민들의 통일 열기 등을 이용해 동·서독 회담에 4대 전승국이 참여하는 ‘2+4회담’으로 바꾸었다. 혼자서 통일을 결정할 수 없는 국가였지만 마지막에는 주도권을 쥐고 스스로 통일을 결정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