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뚝 떨어진 ‘막강 로비단체 AIPAC’
입력 2014-03-05 01:33
미국 워싱턴DC 일대에 20㎝가 넘는 폭설이 쏟아진 3일(현지시간). 7번가에 위치한 워싱턴 컨벤션센터에서는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연례 총회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AIPAC는 수십년간 미국의 중동정책을 사실상 배후에서 움직여 왔다는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단체. 미국 내 유대인들의 자금력과 단합을 바탕으로 연방 상하원과 행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AIPAC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1만4000명의 회원들이 4일까지 이어지는 총회에 참석하며, 400여명의 연방 의원들이 각종 세미나와 소모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흘간의 총회 기간 중 하이라이트는 3일 밤 연례 만찬. 기조연설자로 나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나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의문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AIPAC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강력히 반대해 온 이란과의 핵협상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나쁜 협상보다 더 나쁜 것은 협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라며 “(이란과의 핵협상은) 이란을 신뢰하자는 게 아니라 이란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총회의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AIPAC가 결정하면 미국이 움직인다는 자신감보다는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주저하는 분위기”라고 보도했다.
12년째 연례 총회에 참석해 온 한인 유권자단체 시민참여센터의 김동석 상임이사는 “과거에는 케리 장관이 오늘처럼 이란과의 핵협상의 정당성을 변호했다면 야유가 쏟아졌을 것”이라며 “AIPAC 지도부는 물론 일반 회원들도 자금과 유대인 표를 쥐고 있다는 이유로 참석 의원들에게 고압적이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이사는 AIPAC의 사기가 저하된 것이 뚜렷해졌다고 요약했다.
사기 저하의 최대 이유로는 AIPAC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협상에 합의하는 등 AIPAC의 로비가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약발’이 먹히지 않는 점이 꼽힌다. ‘아랍의 봄’ 이후 중동정세가 급변하면서 ‘이스라엘의 국익=미국의 국익’이라는 등식이 맞지 않는다는 미국 내 인식이 확산되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중동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하려는 오바마 대통령과 중동에서의 강한 영향력 유지를 원하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다시 충돌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 협상과 이란 핵 해법 등을 놓고 이견을 노출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