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시작은 반이 아니다

입력 2014-03-05 01:35


파아란 덧버선을 신발 위에 들씌운다. 반들반들한 나무 층계를 조심조심 걸어 올라가는 발소리들, 강당에는 의자들이 두 줄로 반듯하게 앉아서 누군가 앉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의자 위로 자그만 엉덩이가 앉는다. 이윽고 서툰 관현악 반주에 맞춘 애국가 제창,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잘 자라게 해주신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립시다…”라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고, 자그만 손들이 합장을 하고 무릎을 구부린다. 이마를 무대 바닥에 대고 조금 있은 다음 일어난다. 이어 일렬로 무대를 내려오는 작은 발들…. 손녀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풍경이다.

처음 학부형이 된 젊은 어머니들, 젊은 아버지들, 아직은 젊은 할머니들, 젊은 할아버지들…. 아마 모두 착잡한 마음들이었을 것이다. 입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을 교실로 보내고 나서 학부모들에게 교육의 방향, 앞으로의 교육적 포부, 부모들이 해야 할 일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교장 선생님. 그런데 PPT 스크린에 몇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모델로 삼아야 할, 또는 모델이 되어야 할 몇 사람들의 얼굴이다.

교장 선생님은 면면을 설명한다.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었다고 이야기되는’ 어느 외국 재벌의 모습.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의 회장. 그러고 보니 거기엔 사상가도, 교육자도, 물론 시인도 철학자도 없다. 교장 선생님은 유난히 인성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인성교육에 관한 그 어떤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5000년 한국사에서 그렇게 뽑아낼 인물이 없었을까. 또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보여줄 그런 인물이 한 분도 없었을까. 거기에도 외국의 소위 재벌 회장이 나와야 하는 것일까. 그것도 몇 명씩이나. 여기 이 나라의 인물을 모델로 삼으라고 하는, 고리타분한 교육은 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인성은 거기, ‘돈’에 있다는 것일까.

강당 한 귀퉁이에 앉아서 ‘푸른 ○○초등학교 우리의 미래’라고 쓰인, 연둣빛으로 빛나는 플래카드를 보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고리타분한 교육에서 벗어나는 길일까를 생각한다.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오늘의 1학년 입학식은 시작이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시작은 결코 반이 아니라는 생각이 오늘처럼 강하게 들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시작은 반이 아니다. 전부이다. 어떤 모델을 인생의 롤 모델로 만들어 보일까, 하는 시작을 만드는 선생님들, 이 시작이 아마 아이들의 인생을 끌고 갈 것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시작이 전부였다.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