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의 현대화… 서공임 ‘민화에 홀리다’

입력 2014-03-04 01:33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76) 국왕과 소피아(76) 왕비가 199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인사동에 들렀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국왕 부부는 한국 전통회화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소피아 왕비는 마침 이곳에서 전시를 열고 있던 민화작가 서공임(54)의 작품에 반했다. 그리고 방한기념으로 서 작가의 호랑이 그림을 구입해 가져갔다.

부귀영화와 수복강녕의 의미를 담은 민화는 200년 전 조선시대 서민들이 그리기 시작했다. 사대부들의 문인화와 산수화에 비해 시골 장터의 환쟁이 그림이라는 대우를 받았다. 민화는 한 번도 예술적 지위에 오르지 못했으나 우리 주변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회갑연, 돌잔치, 결혼식 등에 사용되는 민화는 그만큼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서 작가는 전통 민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취업, 승진, 결혼, 자녀교육, 대학입학, 건강, 편안한 노후 등을 행복하고 즐거운 그림과 문구로 전한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현대 민화작가가 된 건 그가 30여 년 동안 하루 16시간을 꼬박 그림 그리는 데 투자했기에 가능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남달랐던 그가 민화에 반한 것은 19세 때였다. 그림 재료를 사러 화방에 들렀다가 민화수강생 모집 벽보를 우연히 보게 됐다. “무작정 찾아갔더니 어릴 때 대청마루나 벽장문에 붙어있던 낯익은 그림들이 있는 거예요. 곧바로 수강신청을 했지요. 바닥청소도 하면서 도제식으로 민화를 배운 세월이 7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그림을 베껴 그리는 것에 싫증이 났다. 자신만의 새로운 무엇을 찾아 나섰다. 원래의 그림을 재해석해보기도 하고, 재료를 바꿔서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 민화작품으로 1996년 생애 첫 전시회를 가졌다. 스페인 국왕 부부가 전시장에 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람객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대거 몰려들어 유명세를 탔다.

민화의 특성상 그리는 시간보다 준비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물감을 사서 바로 쓸 수 있는 서양화와 달리 민화는 색 가루를 직접 빻고 체로 걸러내고 아교와 섞는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루 종일 물감만 개는 날도 있고, 석회반죽을 개다가 열 때문에 손이 데인 적도 있었다. 오랜 시간을 앉아 있다보니 직업병(관절염 등)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

폴란드 중국 프랑스 등에 한국의 현대 민화를 소개하며 한류에도 기여하고 있다. 10년 넘게 함께 작업한 디자이너 장광효의 의상에 작가가 꽃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연예인과 저명인사들 사이에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한복에서부터 양복, 이브닝드레스 등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도 여러 차례 그의 그림이 멋진 의상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초대전 ‘신춘대길-민화에 홀리다’가 5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을지로 롯데갤러리에서 열린다. ‘축! 합격’(행림춘연) ‘복을 빌어드립니다’(정오모란)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죽매쌍희)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셔요’(수거모질) 등 한글로 재미있게 풀이한 민화 54점을 선보인다. 민화로 제작한 다양한 아트상품도 볼거리다(02-726-4456).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