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상한’ 인질극이 벌어졌다. 영화에서 숱하게 보듯 인질극은 뚜렷한 ‘요구사항’이 있기 마련인데 이 50대 인질범은 “나를 죽여 달라”며 경찰과 대치했다.
김모(57)씨는 1일 저녁 9시15분 지하철 압구정역 부근의 24시간 사우나를 나섰다. 몇 달 전부터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인근 건물 외벽에 머리를 박아 자해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20여m 떨어진 빵집에 들어선 건 9시23분. 그는 “상처를 치료하게 119를 불러 달라”고 했다. 6분 뒤 119구조대가 빵집에 들어서는 순간 김씨는 주방으로 뛰어가 빵 자르는 칼 2개를 들고 왔다.
손님 A씨(48·여)를 위협해 구석 테이블에 앉히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빵집에는 종업원 3명, 119구조대원 3명, 손님 등 10여명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터라 제지하지 못했다. 강남경찰서 강력계와 서울경찰청 인질협상팀 등 경찰 50여명이 출동했다.
김씨는 별다른 요구사항 없이 “내가 고통 받고 있다. 어서 죽여 달라”고 외쳤다. 칼도 인질이 아닌 자기 목에 갖다 댔다. 공포에 떠는 A씨를 안심시키며 강남서 박미옥 강력계장이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도 고통 받고 있다면서요. 그런데 저 분(인질)에게 고통을 주면 되겠어요?”
약 3시간 만인 2일 0시13분 박 계장의 끈질긴 설득에 김씨는 A씨를 놓아줬다. A씨가 나간 뒤 이어진 질문에 침묵하던 그는 0시20분쯤 칼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경찰이 가까이 다가가자 김씨는 “담배를 끄겠다”며 일어서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있던 포크로 자기 목을 찌르려 했다. 경찰은 급히 김씨를 제압해 호송했다.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자동차관리법 위반 외엔 전과가 없었다. 그는 “몇 년 전 아내와 이혼했고 자녀 2명도 외국에 있다” “의류 사업을 하다 지난해 4월 장사를 접고 식당 허드렛일을 하며 주로 사우나에서 지냈다” “4년 전부터 신경안정제를 복용했고 지난해에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등의 진술을 했다.
단골 사우나 주인과 종업원들은 김씨에 대해 “아들이 대기업에 다니고 딸은 외국에서 공부한다고 자랑하곤 했다” “이혼하는 과정에 큰 상처를 받았다더라” “남에게 피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했다” “정신병이 있다곤 전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정상적으로 행동했다”고 전했다.
경찰 인질협상 요원들의 침착한 대처로 ‘묻지마’ 인질극은 사상자 없이 마무리됐다. 협상팀을 지휘한 이종화 경찰대 교수는 “인질범이 특정한 요구가 없었고 정신상태가 불안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감정을 존중해주며 접근한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술대로라면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50대 남성이 왜 인질극을 벌이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가 ‘누군가 나에게 범행을 시켰다’ 같은 발언을 반복하고 있어 피해망상증 등 정신질환 때문에 범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건국대 이웅혁(경찰학) 교수는 “통상 인질범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주장하는데 이번에는 ‘나를 죽여 달라’고 요구해 매우 이례적인 인질극”이라며 “힘겨운 삶에 지쳐 자포자기식 돌발행동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세환 김유나 박요진 기자 foryou@kmib.co.kr
강남 한복판서 인질극 ‘공포의 180분’… 정신질환 50대, 뚜렷한 요구사항 없이 “날 죽여라”
입력 2014-03-03 02:32 수정 2014-03-03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