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공간 노래 연기 ‘후끈’ 무대 제작 ‘북적’… 뮤지컬 ‘빨래’ 연습 현장
입력 2014-03-03 01:35
귤 한 박스가 쑥쑥 줄어갔다. 노래를 부른 이들은 목이 마른지 곡이 끝날 때마다 귤을 꺼내 먹었다.
지난달 25일 밤. 서울 강남구 언주로 공연장 예홀 연습실은 ‘명품 거리’라는 그곳 압구정동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몸뻬’ 입은 아낙, 검정 털신 신은 할머니, 잠바 입은 아저씨, 작업복 입은 외국인 노동자 등이 신세 한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모집 베트남 처녀와 결혼’ ‘담배가게’ ‘쌀 수퍼’ 등의 간판이 그들의 배경이다. 산동네인 듯한 마을 풍경은 마구잡이로 페인트칠을 해선지 촌스럽기까지 하다. 서울 변두리 서민 동네 그대로다.
뮤지컬 ‘빨래’ 공연 연습 풍경이다. ‘빨래’는 서울 대학로 창작뮤지컬로 8년 간 34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스테디셀러’이다. 지금도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 중이다.
한데 이날 공연 연습은 아마추어들이 나섰다. 연극동호회도 아니다. 주부·직장인 등이 그저 뮤지컬이 좋아 세탁기 돌리는 것 미루고, 회식 참석 빠지고 연습에 참여한다. 이날 스태프 포함 20여명이 60㎡ 남짓한 연습실에서 북적였다. 후끈했다.
“제가 놀랐어요. 평범한 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실 줄 몰랐거든요. 이 분들 ‘젊었을 적에 뮤지컬 배우될 걸 그랬다’고 농담합니다. 땀 뻘뻘 흘리시며 고음과 저음을 맞춥니다. 제게 혼나면 더 기뻐하시죠.”
연출자 권성순(47) 한국국제예술원 연기뮤지컬과 교수의 얘기다. 단원들은 그의 피아노에 맞춰 노래와 연기를 한다. 음이 끊기면 사뭇 긴장한다.
이들은 지난 1월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서울 강남교육청과 한국국제예술원이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창단한 ‘강남뮤지컬단’이다. 전업주부, 일반 회사원, 중소기업 대표, 교사, 공무원, 목사, 한의사, 라이브카페 가수 등 다양한 사람이 도전했다.
뮤지컬은 단지 노래만 잘한다고 무대에 설 수 없는 공연 예술이다.
“배역 당 3명을 캐스팅 했어요. ‘빨래’는 도시 변두리 소외된 이들과 이주노동자의 삶을 얘기하거든요. 옥탑방이나 반지하방에 살며 희망을 노래하죠. 3팀으로 나누어 하는 데 어설픈 가창력이나 연기가 서로의 모습이기 때문에 쑥스러워 했었죠.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얼굴이 환해져요.”
이날 출연자들은 한쪽에서 연습하고, 또 한쪽에선 오리고 붙이며 가설무대를 만들었다. 재능이 모이니 무대가 됐다.
몽골 노동자 솔롱고 역의 김귀오(45·라이브카페 가수)씨는 “기부 공연이라는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며 “우리가 배운 뮤지컬 무대에 소외 계층을 초청, 보여준다고 하니 벌써 떨린다”고 말했다. 희정엄마 역의 홍정희(43·주부)씨는 곡 ‘남편 위해 자식 위해’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뮤지컬을 통해 ‘홍정희’를 찾아 나가는 중이다. 같은 역의 김원숙(42·자영업)씨는 “뮤지컬을 배우면서 쇼핑하지 않고 노래방을 가지 않는다”며 웃었다.
연습 기간 중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40대 ‘노총각’ 멤버 한 사람이 연습 중에 쓰러진 것. 단원들은 가족이 입원한 것과 다름없이 병문안을 다닌다.
“예술인으로서 ‘재능기부’란 말을 싫어했는데 단원들이 뮤지컬을 통해 스스로 치유하고 기부하는 것을 보며 내가 시간이 내서라도 도와야겠구나 생각합니다. 연출의 힘이 아니라 단원의 힘이더라고요.” 권 교수의 말이다.
‘빨래’는 오는 8∼9일 ‘예홀’에서 세 차례 널린다(02-2055-1983).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