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태국 김도연 선교사] 기도한지 일주일… 한국서 전화 “교회 세울 곳 없나요?”

입력 2014-03-03 01:32 수정 2014-03-03 09:35


교회 짓기 소망하는 현지 전도사

그녀와 함께 기도한지 일주일…

한국서 전화 “교회 세울 곳 없나요?”


바이떠이는 전도여행 중에 만난 작고 귀여운 여섯 살 여자아이였다. 태국 아이들도 처음에는 좀 쑥스러워하고 낯을 가려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 예쁜 연필이나 크레파스라도 안겨주면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그때 만화 전도지도 전해주고, 십자가 목걸이도 걸어 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는 것이 보통 아이들의 모습이다.

한데 바이떠이는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아무리 예쁜 크레파스를 쥐어주고, 머리에 머리핀을 꽂아 주고, 거울을 보여줘도 찡그린 얼굴이 펴지지를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방콕에서 차로 4시간을 달려 온 싸라부리 시골 마을의 한 여름 햇빛은 얼굴의 흐르는 땀마저 말려버린다. 어른들은 다 어디를 가고 집에 혼자 남아서 다 뜯어진 몇 장 안 남은 그림책을 보고 있던 바이떠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입을 열어보려고 웃으며 온갖 재롱을 떨고 있는 낯선 외국 어른이 영 달갑지 않은 눈치다. 도대체 찡그린 얼굴이 펴질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한번 꼭 안아주고 일어서려는데 할머니가 열린 문으로 들어오신다. 처음 보는 외국 사람에 당황한 눈빛이시더니 금방 환하게 웃으시며 반겨주신다.

할머니는 바이떠이를 안으시며 금방 눈물이 글썽해지시더니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신다. 바이떠이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병을 앓더니 그 후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작고 귀여운 바이떠이는 나를 보고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을 못한 것이었다. 바이떠이가 말을 못할 뿐 아니라 웃지도 않는다고 하시며 눈물을 닦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바이떠이를 한 번 더 꼭 안아주고 돌아섰다.

몇 걸음 나와 다시 돌아봐도 바이떠이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바이떠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을 못하고, 웃지 않아도 생각은 할 텐데. 바이떠이야 다음에 만나면 살짝 한번 웃어 줄래.

전도여행 중에 만나는 아이들은 참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골 마을 대부분 아이들은 낮에도 집에 있다.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고 안 가고, 갈 수 없어서 안 가고, 가기 싫어서 안 간다. 그냥 집에서 자기들끼리 논다. 장난감이 없어도 잘들 논다. 만화전도지를 주면, 만화라고 눈이 동그래진다. 어느새 옆구리에 바싹 붙어 앉는다.

엄마들은 설거지할 때 쓰는 수세미를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이런 수세미를 쓰는 것이 사치인 사람들이다. 한국의 교회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하면 더 받으려고 난리가 난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인기가 좋다. 이것도 한류의 영향이다. 그런데 ‘메이드 인 갓’인 사람들은 왜 서로 싸울까.

지난달 16일에 치니란 교회 헌당예배를 드렸다. 치니란 교회가 있는 곳은 방콕에서 북쪽으로 차로 열심히 달려도 6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패차분도 왕뽕군 왕끄라닷 마을에 있다.

2012년 6월에 집을 임차해서 창립예배를 드린 후 꼭 1년 만이던 지난해 여름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 담임인 위라이 냇쌩시 전도사는 올해 마흔 살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3월 1일 결혼 예정이니 이 글이 활자화되는 날이면 신혼 새댁으로 신분이 달라지겠지.

위라이 전도사는 신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 교회에 와서 아내 김은주 선교사와 중학생이던 딸 온유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왕끄라닷 마을로 돌아갔다. 위라이 전도사에게는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고향 마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었다.

2012년 3월에 왕끄라닷 마을을 찾아 위라이 전도사를 만났다. 동네 아이들 20여명을 모아 공부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치고 있었다. 집을 둘러보니 한심스러웠다. 태국 전통 집이라 1층은 기둥만 있고 사방이 다 뚫린 공간이다. 진흙 바닥이라 우기가 되면 엉망진창이 될 게 뻔했다. 아이들에게 밥도 해준다며 주방이라고 자신 있게 보여준 곳은 그냥 마당 한쪽에 큰 물 항아리 두어 개 엎어놓고 플라스틱 접시 몇 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공부방에도 얼기설기 나무 평상 하나가 전부였다. 몽땅 연필이 굴러서 틈으로 떨어지면 평상 밑으로 기어가 주워 와야 했다. 도와준다고 해도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처음 태국순회선교센터 간판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일이 생각났다. “하나님, 제가 교회가 없는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려고 하는데, 교회를 세울 곳이 있으면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쩌면 이 왕끄라닷 마을이 첫 번째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약속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위라이 전도사에게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묻고 나니 무슨 질문을 이렇게 했나 싶었다. 이미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라이 전도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목사님, 여기에 교회를 시작하고 싶어요.”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 3:10)

금은보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모든 것을 더하셨다는 말씀이 기억났다.

“함께 기도해 보자. 우리의 뜻이 선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위라이 전도사와 함께 기도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내 형편을 둘러보니 사방이 막힌 방안에 혼자 앉아 있는 꼴이다. 처음 태국에 선교사로 올 때 파송예배도 드리기가 어려워서 파송장도 내가 만들어서 왔는데 누가 교회를 세우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처음 시작부터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내 입을 열어 기도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야말로 신묘막측하시다. 방콕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어 한국의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연락을 하셨다. 그 목사님의 첫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선교사님, 태국에 교회 세울 곳 없습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지 석 달도 안 되어 2012년 6월에 장소를 임차해서 치니란(영생)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또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위한 기공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헌당예배까지 드리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시다고 한다. 다 아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는데 저것은 모른다면 그것은 전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고 한다. 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할 수 있으신데 저것은 할 수 없으시다면 그것은 전능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못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런 하나님이 내 아버지다.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 내 평생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한 때에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안 주신다면 그것은 그때에 내게 필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내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게 그런 분이셨다. 앞으로도 내게 그러실 것이다. 나는 태국의 크리스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태국, 너희 나라에 내 생명도, 늙으신 부모님, 형제들, 내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드렸다. 너희는 너희 나라를 위해 무엇을 드렸는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살리셨고, 이제 우리의 생명으로 또 다른 생명을 살리신다. 태국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살리시는 또 다른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1)

김도연 선교사

△1961년 서울 출생 △2003년 서울장신대, 2005년 장신대 신대원 목회연구과정 졸업 △2005년 장기 선교사로 태국 도착 △2007년 예장통합 서울동남노회에서 목사안수 △2012년 태국 순회선교센터 창립 △현재 태국순회선교사역, 태국어성경무료보급, 태국어 전도자료 무료 보급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