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학생 위한 뉴욕 다양한 학교들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 소녀 리아(17)는 1년 전만 해도 ‘왕따’였다. 서툰 영어 실력 때문에 친구들과 대화조차 쉽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과외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교사는 무관심했다. 리아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그림자마냥 학교를 맴돌다 돌아왔다. 차츰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뉴욕 학교에서는 무단결석일수가 5일이 넘으면 곧바로 자퇴 조치가 내려진다.
리아가 달라진 건 6개월 전 인근 조지프 배리 직업기술학교(Joseph M. Barry Career&Technical Education Center)로 전학을 오면서부터다. 이 학교의 특성화 학과인 미용학과는 학업 의욕이 떨어진 리아의 관심을 끌었다. 평소 외모에 관심이 많던 리아는 미용기술은 물론 화장법, 네일아트 기법까지 가르치는 미용학과의 우등생이 됐다.
국민일보 취재진이 학교를 방문한 지난해 11월 리아는 학교 내에 위치한 미용실습실에서 레게 스타일인 ‘콘로(corn-row) 머리’를 땋고 있었다. 리아는 “이 학교에 와서 하고 싶었던 미용 공부를 하면서 내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며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최고의 헤어 아티스트가 되는 게 꿈”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뉴욕 문제아들 집합소가 성공한 이유
미국 뉴욕주 남쪽 나소 카운티에 위치한 조지프 배리 직업기술학교는 뉴욕의 온갖 ‘문제아들’이 모이는 일종의 공립 특성화 고교다. 자퇴생,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학교 부적응 학생, 미혼모, 임신한 학생,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이민자 학생들까지 일반 고교에서 버티지 못한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닌다.
학생들은 이 학교의 인기 비결로 다양성과 포용성을 꼽는다. 미용학과, 조리과, 항공운항과, 치위생과, 스포츠의학과, 유아교육과, 자동차정비과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갖춘 조지프 배리에서는 한국의 전문대학 수준의 심도 있는 직업교육이 이뤄진다. 직업교육을 하면서도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국·영·수 위주의 교과 운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내 특성화 고교들과 다른 모습이다. 한국 대학에도 몇 대 없는 비행 시뮬레이션 기구를 교내에 갖춰놓고 전문적인 파일럿 양성 교육을 하고 있는 항공운항과의 모습이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춘 미용 실습실에서 헤어 수업을 하는 미용학과 학생들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미혼모, 임신 학생에게도 졸업장 주는 학교
한국이라면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 결코 발을 붙일 수 없는 학생들을 조지프 배리는 포용하고 있었다. 미혼모나 임신한 학생들이 그들이다. 학교 복도를 지나다보면 앳된 얼굴에 배가 부른 학생들이나 아이를 안고 교실에서 나오는 여학생 무리를 볼 수 있다.
학교는 미혼모나 임신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은 물론 ‘10대 부모 프로그램(Teenage Parenting Program)’을 운영 중이다. 이들의 학업 중단을 어떻게든 막아보자는 취지다.
교장과 함께 총괄적인 학교 업무를 맡고 있는 로라(53·여) 보조 교장은 “미국 학교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해도 미혼모나 임신 학생들을 받아주는 곳은 드물다”며 “일반 학교에서 밀려나면서 양산되는 학업중단 위기 학생들을 학교라는 제도 속으로 품기 위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생후 7개월 된 자신의 아이와 함께 이 학교 유아교육과에 재학 중인 미혼모 에일린(가명·16)은 “다른 미혼모들과 함께 경험을 공유하며 부모가 되는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며 “임신 학생이나 미혼모들을 철저히 배척했던 이전 학교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부류의 학생들을 색안경 없이 포용하는 학교지만 모든 학생이 원한다고 해서 이곳에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학생의 의지다. 자퇴 여부나 이전 학교에서의 비행 경험, 가정형편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입학 전 학생과 여러 차례 면담해 학생 스스로 얼마나 자신의 꿈에 대한 의지를 가졌는지 엄격하게 판단한다. 보라색 머리에 파란색으로 진한 눈화장을 한 자퇴생 리아가 이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뉴욕 최고의 헤어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던 그녀의 의지 덕이었다. 제임스(58) 교장은 “위기학생들을 모아놨지만 주변 어떤 고교들보다 졸업률이 높은 것은 바로 학생들의 강한 의지 때문”이라며 “문제아들도 어떤 교육환경에서 어떤 동기 부여를 받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양해진 학생들에 맞춘 다양한 학교들
이런 조지프 배리의 성공 뒤엔 2000년대 초반부터 위기학생 교육에 정성을 쏟고 있는 나소 교육지원청(Nassau Board Of Cooperative Educational Services)이 있다. 뉴욕주 나소 카운티의 교육을 총괄하는 나소 보스는 조지프 배리 직업기술학교의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지원하고 있다. 나소 교육지원청은 ‘뉴욕만큼 다양한 위기학생이 많은 곳도 없다’는 점에 착안,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위기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학교를 양성하는 데 힘써왔다.
예술거점학교인 롱아일랜드 예술고등학교(Long Island High School for the Arts)와 대안학교인 발도르프 학교(The Waldorf School)도 그중 하나다.
롱아일랜드 예술고교는 언뜻 보면 특목고 같지만 엄연히 일반고다. 단 ‘예술을 위한(for the Arts)’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예술 과목을 중점으로 운영한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부터 운영 중인 ‘교육과정 거점학교’와 유사한 형태다. 학생들은 오전에 원래 소속 학교에서 정규 학습 과정을 마치고, 오후가 되면 이곳 롱아일랜드 예술고교로 등교해 뮤지컬이나 드라마, 영화, 댄스, 실용음악 등 저마다 관심 있는 예술 과목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학생들의 등하교는 나소 교육지원청의 스쿨버스가 책임진다.
세계적 뮤지컬 극장가인 브로드웨이가 인근에 있는 탓에 배우를 꿈꾸는 뉴욕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프랭크(70) 교장은 “미국 대학수능시험(SAT) 과목 위주의 학교에선 문제아였지만 우리 학교에 와서 재능을 발휘하는 학생이 매우 많다”며 “위기학생 관리의 첫 번째는 동기부여를 통해 학교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식 전인교육을 바탕으로 한 발도르프 학교 역시 ‘동기부여’를 첫 번째로 강조한다. 발도르프 학교는 경쟁이 아예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학교 11학년 같은 경우 문학 시간을 통해 단테의 ‘신곡’을 배우지만 평가 방식은 모두 다르다. 한 그룹은 독후감을 쓰고, 다른 한 그룹은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한 그룹은 현대무용으로 작품을 표현하는 식이다.
시험 위주의 학교를 다니며 창의적 욕구가 억눌린 아이들이 이 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다. 발도르프 학교의 입학처장인 크리스 박사는 “뉴욕 최고 명문고인 헌터스쿨을 다니던 학생들 중에도 입시 경쟁에 지쳐 이곳 발도르프로 전학을 많이 온다”며 “창의적인 교과 프로그램을 통해 경쟁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곳에는 우울감과 불안에 떠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진로상담교사·심리학자·사회복지사가 모두 학교 안에
혹 이들 학교 안에서 왕따나 성적 비관, 우울감을 겪는다고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조지프 배리 직업기술학교에는 상담교사 5명, 심리학자 1명, 사회복지사 1명 등이 학생들을 위해 재직 중이다. 발도르프 학교 역시 학생들의 위기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학생 정신건강을 담당하는 심리교사 5명이 상주한다.
나소 교육지원청의 한 관계자는 “뉴욕의 고교들은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보다 학생의 정신건강과 행복감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지겹지 않은 학교, 학생들의 꿈에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뉴욕=글·사진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
[착한 사회를 위하여-학교 떠난 아이들을 품자] (9) 해외 대안학교 - 미국편
입력 2014-03-03 02:31 수정 2014-03-03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