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95돌] ‘A라 쓰고 B라 읽는다’ 표현…일본 만담식 언어구조
입력 2014-03-01 02:31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들어 ‘말의 파격’을 즐기고 있다. 교과서 같던 말투에서 벗어나 “통일은 대박” “개헌은 블랙홀” 같은 말을 쏟아내더니, 지난 19일 국토교통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는 “규제개혁이라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 읽는다”고 했다. “규제 혁신 없이는 일자리 창출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말을 하나 지어봤다”고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러자 21일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의 공공개혁안을 비판하며 “공공개혁이라 쓰고 낙하산 인사라 읽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국가정보원개혁특위 구성안이 가결된 뒤 새누리당 한기호 최고위원이 “국정원 무력화라 쓰고 국정원 개혁이라 읽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잇따라 사용할 만큼 ‘A라 쓰고 B라 읽는다’란 표현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소치 동계올림픽 때는 ‘김연아라 쓰고 여신이라 읽는다’, 메이저리그 야구를 두고는 ‘추신수, 1번 타자라 쓰고 4번 타자라 읽는다’ 같은 말이 인터넷에서 유행했다.
이 표현이 처음 회자된 건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했을 때다. 기아의 승승장구를 이끈 이종범을 응원하며 팬들이 ‘이종범이라고 쓰고 신(神)이라 읽는다’는 플래카드를 내걸면서 주목을 끌었다. 이때부터 네티즌들 입에 오르내리던 말이 이제 대통령까지 사용할 만큼 확산된 것이다.
이 표현은 한자를 음독과 훈독, 두 가지 방식으로 읽는 일본어에서 비롯됐다. 같은 글자에 두 가지 발음이 존재해 ‘A라 쓰고 B라 읽는다(Aと書いてBと讀む)’는 말이 상용구처럼 된 데서 파생한 일종의 ‘언어유희’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도 이런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은 “일본의 만담 등에 자주 나오는 표현 구조”라고 설명했다.
국립국어원 김형배 학예사는 “우리말 특성과 맞지 않는 표현인데 언어는 쓰는 이들의 욕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며 “어떤 단어의 보편적 뜻 대신 새 의미를 제시하는 방식의 언어유희로 변용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