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재찬] 1170만원에 대한 단상

입력 2014-03-01 01:35


#. ‘국민행복기금 4000만원. 이자 월 159,450원. 고객님 명의로 이용가능….’

대출광고 스팸 문자를 지울 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S은행 김성미 과장’. 얼굴은 모른다. 다만 나긋나긋한 그녀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면 뒷목이 뻐근해진다.

S은행이라며 전화가 걸려온 게 지난해 4월 초였다. 은행 대출을 알아보고 있냐면서. 당시 급하게 이사를 준비하며 전세자금 대출에다 대환대출까지 알아보던 터라 더없이 반가운 전화였다. 김 과장은 대출희망 금액과 금리, 대출 시점 등 내가 제시한 모든 조건에 100% 맞춰줄 수 있다고 했다. 대출 사기의 출발은 달콤했다.

이튿날 다시 전화를 걸어온 김 과장은 안내사항이 있다며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이른바 ‘대출보증료’ 얘기였다. 은행이 정부 자금을 받아 대출해주는데, 정부 측에 대출자 확인을 거치는 용도로 보증료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하루만 입금했다가 정부 지원금이 은행에 들어오는 즉시 내 계좌로 다시 입금해준다는 설명이었다. 사기라는 걸 간파하고 당장 전화를 끊었어야 할 단계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분명히 뭔가에 씌워 있었다. 이사는 보름이 채 남지 않았고, 둘째를 막 출산한 아내는 산후조리원에 누워 있던 때였다. 김 과장은 보증료 액수가 조금 많다고 했다. 970만원. 그만한 현금이 없다고 하자 신용카드 카드론을 쓰냐며 현금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바로 송금했다. 여기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

이튿날 김 과장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은 곳은 아내가 머무는 산후조리원이었다. 김 과장은 내일 바로 대출금을 입금할 건데, 200만원을 더 입금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정책이 바뀐 걸 몰랐다고 미안해하면서. 옆에서 통화 내용을 엿듣던 아내가 당장 전화를 바꿔 달라고 했다.

“대출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신은 몸조리나 잘해!”

아내에게 면박을 주고 스마트폰으로 200만원을 보냈다. 전날 송금한 970만원을 합해서 총 1170만원은 내일 다시 들어올 테니까.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 김 과장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1566-6705. 이 번호는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뚜뚜뚜’하고 있다.

#. 지난해 12월 중순, 첫째아들 어린이집 송년의 밤에 참석했다. 학부모와 자녀 등 30여명이 둘러앉아 한 가정씩 돌아가면서 한 해 동안 감사한 일을 나누는 시간. 아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둘째를 출산한 것, 집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낸 것, 가족간의 사랑이 끈끈해진 것….” 사실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 김 과장을 잡지도, 잃은 돈을 찾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명색이 ‘기자’ 남편이 사기당하는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본 아내는 이상하리만치 남편을 감쌌다. 나는 아내로부터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다.

사건 이후 나름대로 죗값을 치르겠다며 가사를 돕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자연스럽게 아내와 속 깊은 얘기를 나눌 때가 많았다. 대화를 하면서 부끄러운 나의 민낯이 드러날 줄은 몰랐다. ‘내가 이렇게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었구나.’ 전화대출 사기라는 사단이 난 뿌리는 내 안에 있었다.

#. 산후조리원에서 200만원을 송금한 뒤 김 과장이 전화를 받지 않자 슬슬 걱정이 밀려들었다. S은행 본점에는 내가 찾는 김 과장이란 사람이 없었다. ‘희망전환론’이란 대출상품도 없긴 마찬가지. 금융감독원의 사금융사기피해신고센터(1332)에 부랴부랴 전화를 거니 김 과장만큼이나 친절한 상담원이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줬다. “고객님, 안타깝지만 전형적인 전화대출 사기입니다.”

생돈 1170만원을 입금하기까지의 과정을 복기하고 또 복기해 봐도 ‘내 탓이오’뿐이었다. 1000만원 넘는 보증료를 덥석 송금하는 바보가 어디 있으며, 아내와 상의는 왜 안 했는지, 무엇보다 은행 창구를 왜 직접 방문하지 않았는지…. 자책과 분노, 울분, 수치심이 잊을 만하면 속에서 밀려나왔다.

사건 이후 숫자 ‘1170’은 여러 가지를 되뇌게 만든다. ‘우선멈춤’ ‘심사숙고’ ‘호시우행’…. “불혹을 앞두고 비싼 수강료 주고 인생공부한 거라 생각하자.” 지난해 마지막 날, 아내 위로 한마디에 묵은 울분을 털어냈다.

#.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보름쯤 지났을까. 4000명도 아닌 4000만명의 개인 신상정보가 털렸다니. 주거래 K카드사 이름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났다. ‘개인정보 유출여부’를 확인하니 아내와 나의 17가지나 되는 개인정보가 몽땅 털렸다.

설 연휴 내내 쏟아지는 스팸 문자 지우기에 바빴다. 이러다가 김성미 과장이 또 전화를 걸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울한 상상을 했다. ‘너, 가만히 안 놔둔다’ 협박을 할까.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읍소를 할까, 아니면 인생공부 시켜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건네야 할까.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