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장희] 국세청 배구단의 추억

입력 2014-02-28 01:34


‘190전 176승 14패.’ 승률 9할2푼6리. 창단 후 6년 만인 1973년에 해체한 국세청 여자배구단의 공식 성적이다. 해체 후 감독과 선수들이 그대로 옮겨간 미도파 배구단은 한때 184연승이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남겼다.

국세청 배구단은 어떻게 강팀이 됐을까. ‘배구 붐 일으킨 국세청’이라는 1969년 신문 기사를 보자. “작년에 국세청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성들로 여자배구단을 창단했는데 이 신진팀의 대전실적이 기성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금년 초 이낙선 국세청장이 배구협회장에 취임하게 됨을 계기로 직원들의 배구 열기는 상하를 막론하고 가열됐다.”

물론 피나는 훈련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인으로만 구성된 배구단이 기성팀과 열 번 싸워 아홉 번 이상을 이길 수 있었던 배경 설명으론 부족하다. 재계 인사가 전해준 일화를 듣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용인즉 ‘5·16 혁명’ 세력인 이낙선 청장 시절 국세청의 위세는 엄청났고, 유망주를 뽑고 싶어도 관할 세무서 눈치 때문에 다른 팀들이 스카우트를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배구선수 스카우트를 다룬 70년 기사는 당시 국세청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올 (고교) 졸업생의 쌍벽 조혜정과 윤영내는 이미 국세청으로 낙찰, 70년도 여자 배구계를 휘잡아온 국세청의 독주는 71년도에도 건재할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해 준다. 국세청이 올해 졸업하는 가장 우수한 선수들을 몰아가자 다른 실업팀에서는 ‘팀의 존속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비명을 질렀다.”

40년이 흐른 지금의 국세청은 어떨까. 2006년 국세청이 도입한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는 잡음이 없진 않았지만 봉급생활자들과 발급기관의 큰 수고를 덜어줬다. 증빙서류를 수집하고 발급하는 데 들어가는 납세협력비용 9475억원이 절감됐다는 조세연구원 분석도 있다. 국세청은 또 탈세 제보 포상금을 늘려 지난해 1조3000억원 이상 세금을 거두는 성과도 냈다. 권력기관 이미지를 벗고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변치 않은 게 있다. 여전히 국세청은 무서운 존재라는 점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중점 과제로 내건 현 정부 들어선 더욱 그렇다. 국세청이 ‘세무조사’ 때문에 분주해지자 나름 세금을 꼬박꼬박 내왔다고 생각하는 기업이나 국민들 사이에선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장사가 안돼 매출이 줄었는데 동종 업계 평균에 비해 현금매출이 적다며 수정 신고하라는 세무서의 통보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자영업자의 하소연도 들린다.

세금의 공포는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오죽했으면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가혹한 세금(苛政猛於虎)’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을까. 고강도 세무조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국세청은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제 활력 회복을 위해 올해 세무조사는 ‘세심’하게 운영하겠다고 보고했다. 세무조사 횟수와 기간도 줄이겠다고 했다. 세수부족이 만성화된 상황에서 복지재원을 조달해야 하는 정부가 과연 세심하게 세정을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쥐어짜기’식 세무조사는 이제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호화청사 건립 논란에 연말마다 멀쩡한 보도블록이 교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납세자들의 속은 쓰리다.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무적 배구단 같은 막강 국세청보다 성실 납세에 고마움을 느끼는 친절한 국세청일 것이다.

한장희 경제부 차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