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겨울 바이칼, 봄의 시작
입력 2014-02-28 01:34
시베리아 남동쪽에 위치한 바이칼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은 호수라고 한다. 말이 호수지 길이만 636㎞에, 최대 수심이 1742m, 전 세계 담수량의 2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2월,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명상여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창 책에 재미를 들이던 시절,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편애했는데 그중에서도 바이칼 호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많았다. 마치 유년기의 꿈 같기도 하고 오랜 전설 같은 신비한 그곳에 발을 들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태초의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몸을 씻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황홀한 경험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들뜸과 달리 바이칼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박2일을 달린 끝에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그러고 나서도 7∼8시간을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가야 목적지인 알혼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양말 세 겹, 겉옷 세 겹, 장갑 세 켤레도 어림없이 몇 분 안 되어 금세 머리가 얼얼해질 만큼 매서운 추위가 으르렁대고 있었다.
단단히 무장한 우리 일행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본원지라는 부르한 바위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얼어붙어 더 고요한 바이칼 호수, 바위의 신비한 힘이 전해지듯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행이 숙소로 돌아가고 난 뒤 혼자 남아 얼음 위에 누워보니 마치 미지근한 마음을 깨우듯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엔 바이칼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서 일출명상이 진행되었다. 이른 아침 꽝꽝 언 얼음 위를 달려 도착한 곳엔 ‘겨울왕국’에서 본 듯한, 청빛의 얼음들이 장관을 이루며, 그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얼음 위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 옷 속을 뚫고 느껴지는 한기와 함께 저 깊고 깊은 바이칼 호수 아래로 그동안의 근심들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멀고 추운 바이칼까지 찾아온 것일까. 우리는 겨울의 심장에 다가갔지만 만나고 온 것은 봄의 시작이었다. 찌를 듯한 추위가 오히려 온 마음을 덥히는 뜨거운 눈물이 될 수 있음을, 평범해 보이는 한 사람의 인생도 수심 1000m의 바이칼 호수처럼 깊고 넓은 것임을 배웠다. 그리 갖고 싶던 인생의 내공이 무언가를 아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자라는 거라고 보여주었다. 그 깊고 고요한 바이칼을 닮고 싶었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