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거대한 빙산… 채호기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입력 2014-02-28 01:34


채호기(57·사진)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문학과지성사)의 편제는 독특하다. 시집은 으레 1부나 2부 등으로 나뉘기 마련인데 이 시집은 대신 ‘피부가 찢어져 노출되는 글자’라는 소제목 아래 43편의 시를 배치한 뒤 다시 ‘종이에 박힌 침묵’이라는 소제목 아래 ‘얼음’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배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부가 찢어져 노출되는 글자’와 ‘종이에 박힌 침묵’ 사이에서 채호기가 포착하는 시적 순간은 아주 예민하게 몸을 열어두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백색의 기척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문장은 출입구 없이/ 창문만 있는 좁은 방./ 그 창문에서 그대가 내다보는 것을/ 오후의 햇빛이 지켜보았지.// 그녀가 문장을 읽을 때/ 그대는 유리창에 어른거리네./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그대는 사라지는 그녀의 현기증”(‘창문’ 1∼2연)

‘그녀의 현기증’으로 표현되는 어떤 기척을 포착하기 위해선 긴 침묵이 필요하다. 이때 ‘그녀의 현기증’이 침묵 속의 외침이 되어 다가오기까지엔 순도 높은 몰입의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대’와 ‘그녀’ 사이의 몰입은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감각의 현장이기도 하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결합되어있는 이런 이미지야말로 채호기식 존재론이랄 수 있겠는데 이 시의 다음 연에서 이런 결합은 깨지고 만다. “어떤 문장은 창문만 있는/ 실내가 없는 반지./ 아무도 보지 않아도 그대는/ 그녀의 손가락에 매달리지.// 창문을 봉해버린 집./ 더 이상 그녀가 읽지 않아도/ 그대는 보이지 않게 홀로 검은/ 출입구 없는 침묵의 돌.”(‘창문’ 3∼4연)

시 ‘창문’은 ‘그대’와 ‘그녀’가 만나고 떠나는 결합과 균열의 이중적 이미지를 단 4연으로 드러내 보인다. 그렇다면 시집 맨 마지막을 장식한 시 ‘얼음’은 무엇에 대한 결빙이란 말일까. “언어는 소리도 글자도 아니며/ 우리가 상상하는 부재의 사물도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뜻도 아닌 것./ 언어는 침묵이다/ (중략)// 어쩌면 침묵은 이 거대한 빙산이다”(‘얼음’ 부분)

채호기가 언어의 결빙인 침묵의 방식을 시집 맨 뒤에 배치한 것은 소제목 ‘피부가 찢어져 노출되는 글자’ 아래 수록된 43편의 시들을 다시 침묵으로 결빙시키고 싶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는 결국 언어를 탐구하는 물질주의자임을 이 시집을 통해 선포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