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 은희경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입력 2014-02-28 01:34


흔히 은희경 소설을 두고 ‘엄마와 딸이 함께 읽는 브랜드’라고 말하는 이유는 데뷔작 ‘새의 선물’(1995) 이래 그가 다루어온 주제가 소녀들의 성장통으로 집약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소녀들의 성장통뿐이겠는가. 사실 세상이라는 친절하지 않은 시공간에 던져진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신산한 신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은희경(55)의 신작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는 우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과 풍경을 통해 인간 실존의 상황을 압축해 보여주는 6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의 주인공 안나는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 ‘춥다’라는 말로 첫 인상을 드러낸다. 이때 안나가 체감한 추위는 남쪽 해안가의 고향마을과 서울 사이에 가로놓인 위도 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열아홉 살에 맞이한 그해 겨울, 성인으로 넘어가기 전에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다. 안나는 서울의 크기에 압도당해 적응하지 못한다. 안나가 머무는 하숙방은 상대적으로 너무 좁고 누추하다. “냉기가 감도는 어둑한 복도 양쪽에 굳게 닫힌 방문들이 보였다. 안나의 방은 끝방이었다. 넓게 펴놓은 이불 한 채와 앉은뱅이책상 하나만으로 꽉 찰 만큼 작았다. 미망인은 샤워실을 방으로 개조했다고 말했지만 그곳은 여전히 방보다는 샤워실로 보였다. 수도꼭지를 뜯어내고 바닥에 전기장판을 깔았을 뿐이다.”(17쪽)

차가운 방에 웅크린 안나의 모습은 읽는 이의 마음마저 얼어붙게 한다. 이에 비해 안나가 학원에서 만난 루시아는 대조적인 성향의 소녀이다. 루시아는 유복한 가정환경과 돋보이는 외모에 당돌한 성격의 소유자다. 둘은 학원에서 한 남학생을 동시에 좋아하지만 결국 그는 루시아의 남자친구가 된다. 소설은 어른이 된 안나가 루시아와 그 남학생과 더불어 맞이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1976년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이란 이름은 천체에서 사라졌고 그리고 화성에 내리는 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그것은 지상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42쪽)

은희경 소설의 비밀은 순수했던 성장기의 슬픔과 함께 위안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끼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 지금 겪는 슬픔과 방황이 훗날 성장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의 주인공 이원은 대학 졸업 후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친구 집에 머물고 있다. 그는 자신이 “뭔가 남들의 방식과 핀트가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약속시간에도 자주 늦는가 하면 친구 유나와는 달리 자기를 꼼꼼히 관리하는 일에도 능숙하지 못하다. 그는 “자신이 잘 배우지 못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린 일이 좌절을 일상화시켰다면 실패한 배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위축 같은 것이었다. 한 가지를 실패할 때마다 집이 좁아지듯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오그라들며 좁혀져 왔다. 그리고 열고 나가려 할 때마다 문에서는 경보음이 울렸다.”(163쪽)

‘프랑스어 초급과정’은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신도시로 이주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입주한 그는 생각보다 자신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그의 소망은 바이올렛 화분을 자꾸 불려나가는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바이올렛 잎과는 달리 사람은 어디에도 쉽게 뿌리내리기 힘든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할 따름이다.

은희경 소설은 뿌리내리지 못한 자의 슬픔과 상실감을 통해 우리가 낯선 인생에 부딪혀 상처입고 괴로워하면서도 또다시 낯선 곳을 부단히 찾아다닐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흔히 ‘인생 뭐 있겠어?’라는 탄성을 자주 듣지만, 뭐가 있는 게 인생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가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건너가는 하나의 포즈라는 걸 은희경은 잔잔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