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위대한 철학자의 그림자를 좇아서

입력 2014-02-28 01:31


좋은 유럽인 니체/데이비드 크렐·도널드 베이츠/글항아리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려우리라. 100년만 기다려보자. 아마도 그때까지는 인간을 탁월하게 이해하는 천재가 나타나서 니체라는 인간을 무덤에서 발굴한 것이다.”(니체 서간집 중)

20세기 유럽의 종교, 문학, 철학 등 전 분야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 등 역사상 뛰어난 철학자들이 그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 작업을 벌여왔지만, 여전히 니체 발굴 작업(?)은 진행 중이다.

니체가 주어진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관점주의’ 인식론을 펼쳤기에, 그의 글은 상호 모순될 뿐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신은 죽었다’며 기독교 신앙은 물론 현세를 초월하는 기독교적 도덕 이념까지 비판했던 니체. 그는 ‘우상의 황혼: 혹은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법’ 의 저서 제목이 말하듯 당시 서양을 지배하고 있던 사상과 시대적 관념을 산산이 깨부순 철학자였다.

그런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의 저자들은 역사상 지금까지 동원된 방식 중 제법 참신한 방법론을 동원했다. 니체가 일한 곳들, 특히 그가 글을 쓰고 교정을 본 지방을 일일이 찾아가 어떤 기후와 환경 속에서 니체가 어떤 글을 썼는지 추적에 나선 것이다. 사진작가인 베이츠는 풍경을 찍고, 니체 전공 교수인 크렐은 그 장소에서 니체가 했던 작업을 분석했다. 책의 부제를 ‘니체의 집필 풍경’이라고 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니체 본인이 기후와 지역을 무엇보다 강조한 데서 착안했다. 니체는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기후는 신진대사에 영향을 미쳐 신진대사를 저해하거나 활발하게 하기 때문에 장소와 기후를 잘못 선택하면 자신의 임무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려 그 임무와 대면하지도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질병에 시달리며 생애 마지막 10년을 거의 정신 착란에 빠져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니체가 사랑하고 실제로 머물렀던 독일 라이프치히 남쪽 바이마르와 스위스 바젤과 제노바, 프랑스의 니스,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토리노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추적한다. 니체는 스스로를 ‘고국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누구보다 ‘좋은 유럽인’으로 살고자 했다.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군국주의를 앞세워 전쟁으로 독일 통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참지 못했고, 그런 독일의 내셔널리즘을 죽을 때까지 비판했다.

“고국이 없는 우리는 ‘근대적 인간’으로서 인종과 혈통이 굉장히 다양하게 섞여 있다. 우리는 스스로 독일적인 생활 방식의 표지라고 선언하는 허위의 인종적 자화자찬과 무례함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이는 ‘역사 감각’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는 두 배로 거짓되고 추잡한 짓이다. 한 마디로-이것은 우리 명예를 건 맹세가 되어야 한다-우리는 좋은 유럽인이다. 2000년에 걸친 풍요롭고 풍부한 유럽 정신을 물려받은, 하지만 많은 의무도 함께 물려받은 유럽의 후계자들이다.”(‘즐거운 학문’ 중)

인생 후반기, 니체는 스위스 바젤대 고전문헌학 교수직에서 떠나 유랑하는 철학자로 살았다. 겨울은 지중해에서, 여름은 스위스의 고지 엥가딘에서 보냈다. 저자들은 그 시절을 ‘높은 산의 고독’과 ‘바다와의 친밀한 대화’로 나누고 지역에 따라 달랐던 니체의 저서를 통해 그의 사유를 따라간다.

1881년 그는 스위스 엥가딘의 질스마리아에서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상을 시작했다.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으로 니체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기본 개념인 영원회귀 사상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며, 1881년 8월에 떠오른 사상이다 (중략) 그날 나는 실바플라나 호수 근처의 숲을 산책하다가 주를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이 사상이 내게로 왔다.”(‘이 사람을 보라’ 중) 니체는 그 곳에서 고독 속에 살며 생애 최고의 작품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제노바와 니스 등 바닷가 지역에서 그는 휴식을 취하며 안식을 얻었다. 니스에서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큰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 곳에서 ‘차라투스트라’를 마무리 짓고 이탈리아 토리노로 옮겨갔다. 여기서 그는 ‘이 사람을 보라’를 썼다. 르네상스 이후 군주들의 도시 토리노의 풍경은 위대한 정치에 대한 그의 강박을 자극했다. 그는 토리노의 정돈된 보도 블록의 모습에 감동하는 동시에 그의 책들이 독일에서 금지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런 독특한 시도를 통해 독자들이 무엇을 얻길 바란 것일까. 저자들의 대답은 이렇다. “집필 장소가 니체의 주요 사상에 미친 영향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런 판단은 황당할 수밖에 없으며 이 책은 그런 판단을 내리길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이 예상 밖의 통찰력과 뜻밖의 연관성, 점점 더 커지는 의문, 잠깐 동안의 은밀한 경험, 비밀스러운 즐거움, 행복한 지식 등을 주길 바란다.” 박우정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