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동백꽃 列島
입력 2014-02-28 01:34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장소로 유명해진 경남 통영 장사도 해상공원에 동백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장사도뿐만 아니라 지심도와 외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섬들이 온통 불붙은 것처럼 빨갛게 물들었을 것이다. 바닷가나 섬에 자생하는 동백나무는 차나무과 상록활엽교목으로 딱딱하고 매끄러운 줄기에다 윤이 나는 짙푸른 잎, 새빨간 꽃잎과 수많은 노란 수술이 특징이다. 서양의 시인들은 장미와 백합을 즐겨 노래했지만, 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많이 읊은 꽃은 동백꽃이 아닐까.
동백꽃은 다른 꽃들이 눈 속에 숨어 봄을 준비하는 겨울에 기적처럼 꽃망울을 터뜨린다. 동백꽃은 그러나 질 때의 모습이 더 매혹적이다. 시든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다른 꽃들의 낙화와 달리 꽃잎은 물론이고, 노란 꽃술까지 전혀 시들지 않은 상태에서 통째로 떨어진다. 또한 장엄한 낙화 이후 땅바닥의 꽃들도 오랫동안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숲 속에 붉은 카펫을 깔아놓는다. 꽃 무덤도 꽃 비단길이 되는 것이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스스로 목을 꺾는/동백꽃을 보라/(중략)/모든 언어를 버리고/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허공에 한 획을 긋는/단호한 참수’(문정희, 동백꽃, 부분)
동백 숲이 좋기로 알려진 곳은 경남 거제의 학동과 지심도, 강진 백련사, 월악산 월남경포대 계곡,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장흥 천관산, 고창 선운사, 완도 보길도 등이다. 등산로 중에는 월남경포대길이 아름답다. 거제 외도와 여수 오동도의 동백 숲은 인공적 요소가 많이 가미돼 있어서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선운사가 많은 시의 소재가 됐지만, 운치로 따지면 백련사 부도 밭이 으뜸이다.
사람들은 보통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걷거나 백련사 입구부터 올라가는 길가의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51호)을 구경하고는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어느 해 4월초 백련사에서 만덕산 등산로 초입의 왼편에 있는 부도 밭에 들어섰더니 딴 세상이 펼쳐졌다. 높이가 5∼7m, 가슴높이 직경이 30㎝ 안팎인 아름드리 동백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어두컴컴했지만, 초록색 풀들을 온통 뒤덮은 붉은 꽃무덤이 찬란한 주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장미꽃으로 도배한 욕조 장면이 떠올랐다. 남은 동백꽃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후두둑 떨어졌고, 무수한 동박새 무리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올 겨울 유난히 따뜻했던 탓인지 개화가 이르다. 올 봄에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의 가사처럼 ‘바람불어 설운 날에’ 동백꽃 지는 곳을 찾아가 보자.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