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홍렬 (10) 교회 살림 어려움에 아내 “아이 분유값만이라도”
입력 2014-02-28 01:41
힘겹게 살림을 꾸려가던 아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군부대에서 받는 사례금을 조금만 떼어서 생활비에 보태면 안 될까. 애기 분유값은 있어야지….” 십일조를 해도 빠듯한 살림에 그보다 훨씬 많은 것까지 희생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아내에게는 몹시 미안했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목사는 교회 곳간을 채우는 일을 먼저 할 수밖에 없으니까. 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인 줄 잘 알잖아.” 나는 한술 더 떠서 백일이나 돌 때 들어온 금붙이와 아내의 패물을 팔아 교회 재정에 보탰다. 교회가 무너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나로서도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하루는 아내가 눈물을 쏟으며 하소연했다. “이렇게 힘들게 목회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사서 해요. 당신 적성은 신학을 가르치는 쪽에 조금 더 맞지 않느냐.”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교회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도 흔들렸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여쭙기로 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목회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데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를 하며 답을 찾기로 했다.
교회 사무실의 콘크리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밤낮없이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하고 40일이 거의 다 됐을 때다. 신학의 길을 가야 할지 고민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와 비슷한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눈물이 나면서도 황홀한 그 감동은 어느 논리적인 말씀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르침을 주시는 듯했다. “40년 이상 목회를 할 놈이 고작 1년 좀 넘게 고생했다고 어디를 도망치려 하느냐.” 호된 꾸지람을 들은 것 같았다. 나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가슴 한편에 시나브로 싸두었던 보따리를 당장 풀고 교회로 돌아가 더 열정적으로 일해야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제 힘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찹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위태로웠던 우리 교회와 가정을 붙들어주셨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20년 동안 겪을 어려움을 2년간 압축해서 겪게 해주신 것 같다. 교회의 분쟁과 갈등은 차츰 회복됐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던 교인들이 돌아왔고 꾸준히 새 교인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성도 수는 120여명으로 늘어 있었다.
예산도 늘기 시작했다. 빚만 1000만원이 넘던 교회 재정은 6000여만원을 선교 및 장학 기금으로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게 됐다.
교회가 안정되면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열 수 있었다. 베델성서연구를 토대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작은 교회인데도 여러 차례 3000여명을 초청한 가운데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유명 목회자들을 초청해 2년에 한 번 전도집회를 열기도 했다.
사막도 옥토로 변한다. 문을 닫을 뻔했던 교회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짜릿한 감동을 느낀다. 성도님들은 참으로 열과 성을 다해 부족한 목사를 따라주었다. 한 집사님은 목사 사택을 짓는 동안 자신의 안방을 쓰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그분들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남부루터교회 동창회를 만들겠다고 기도했다.
하나님 은혜로 남부루터교회에서 19년8개월 동안 목회했다. 목회 초기의 어려움은 평생 목회의 자양분이 됐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사랑과 위로,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